시라소니


 
시라소니. 주먹 중의 주먹, 협객 중의 협객인 그는 거의 전설적인 주먹계의 신화이다. 적수가 없었던 그는 애써 유명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의리와 순수한 열정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를 주제로 영화도 많이 만들어졌고, 소설 및 그를 다룬 책들도 출간되어있다.
 
장호근의 대하소설 '시라소니'도 그중 하나이다.
 
저자는 사나이다움이란 무슨 일을 하든지 남에게 부끄럽지 않아야 하고 용기가 있으며 정정당당해야 하고 어떠한 난관이나 역경일지라도 이를 뚫고 나아가려는 의지력과,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는 자부심을 지닌 의리와 의협심이 강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점점 왜곡되어만 가는 현실 속에서 진정한 사나이다움이란 무엇이고 또 의리란 어떤 행위를 의미하는지에 대해, 과거 주먹들의 생애를 통하여 사나이다움과 의리, 이들이 지닌 의협심의 참다운 의미를 규정해 보고 싶어 이 소설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지나간 시대의 망각의 시간 속에 파묻힌 인물들이지만 나라 잃은 민족의 서러움과 괴로움을 주먹으로 달래고 사나이의 강인함과 기백을 중원 천하에 떨치며 중국 대륙을 지역적으로 삼분했던 이상대, 이성순, 장천용 등 세 명의 주인공들을 중심으로 이 시대 젊은이들에게 참다운 의미의 ‘힘’과 ‘주먹’ 그리고 ‘사나이다움’ 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해주고 싶었다는 저자의 의도대로 이 책에는 ‘주먹세계 깡패들의 이야기’로만 볼 수 없는 내용이 담겨 있다.
 
상상을 초월한 주먹대결, 강철 같은 의지와 기백, 기량에 대한 끊임없는 노력과 피나는 훈련, 승부에 관한 끈질긴 근성, 피보다 진한 의리와 우정 등, 식민지시대와 해방 후를 배경으로 작금의 조직 폭력배들과는 다른 의리와 협객으로서의 ‘주먹’들의 세계가 그려져 있다.
 
시라소니라 불리는 이성순을 비롯한 김두한 이상대 엄동욱 등은 주먹세계의 계보로 따진다면 제 1기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협객을 자처할 수 있었던 이유로 시대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식민지 시대 주먹들의 삶은 핍박받는 민중의 삶과 같았고 식민지 시대의 젊은이로서 나아갈 통로가 없었던 그들의 가슴에 담긴 설움과 울분이 주먹을 통해 발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암울한 시대에 가슴속에 먹구름 같은 응어리를 대신 풀어주는 주먹들의 활약은 젊은이들의 희망이 되기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의리와 명분을 중요시 여겼고, 지금처럼 칼, 쇠파이프 등 각종 무기가 난무하거나 뒤에서 공격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제시대, 주먹계는 크게 조선주먹과 일본주먹으로 나눌 수 있었다. 조선주먹들은 이제 갓 걸음마를 걷기 시작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미미했으며 조선 주먹이 가진 이권도 신통치 않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일본 야쿠자들은 일본도로 중무장한데다 고급술집 등 자금줄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일본 주먹의 보스는 '장군의 아들'로 알려진 하야시. 하야시는 평안도 출신으로 본명은 선우 영빈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직력과 자금력에서 월등한 일본 패에 항상 밀리던 조선패가 거대조직으로 성장하게 된 것은 종로 우미관 극장을 주 활동무대로 활약한 김두한 패의 등장에서 비롯됐다.
그러나 우미관 패는 수표교(명동과 종로의 정계) 전투에서 일본 패에 무참히 패하고 조직원들이 징병으로 끌려가면서 조직은 와해 일로를 걷기 시작했다.
 
이 책의 주인공 이성순은 김두한 패가 세력을 확장하기 이전부터 신의주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중국으로 건너가 자신의 이름을 대륙에 알린 인물이다.
시라소니, 그의 본명보다 더 친숙한 이 별칭은 그가 신의주에서 도비노리(밀무역)를 할 때 그의 삼촌으로부터 얻은 이름이다.
 
시라소니는 스라소니의 평안도 사투리로 약하고 어리석으며 주변머리 없는 사람을 얕잡아 부를 때 부르는 것으로 미련한 놈을 의미하는 말이다.그는 이 별명을 좋아했다. 시라소니라는 고양이과에 속하는 이 짐승이 가지고 있는 민첩성과 두려움을 모르는 용맹성을 본받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시라소니가 신의주에서 도비노리를 할 때 유명한 일화가 있다.
 
밀무역을 하는 모든 사람들의 두려움의 대상인 개가 있었는데 몸집은 황소 같고 성질 또한 고약한 개였다. 이 개를 시라소니가 몽둥이로 때려죽인 것이다.
 
그러고도 그는 자랑을 하지 않아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믿질 않았다.이처럼 시라소니는 다른 건달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다. 술과 여자도 가까이 하지 않았고 또 우직한 사람으로 미련하다고 할 정도로 집념이 대단해서 뭘 하겠다고 작정하면 목숨과 맞바꾸는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하고 마는 성미였다.
 
이런 그의 성격은 평양의 박두성이가 세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찾아가서 붙어보는 등 신의주를 비롯한 여러 곳에 이름을 알리는데 일조하고, 중국으로 건너간 후에는 조선인들을 못살게 구는 일본인들을 비롯한 이름난 주먹들과 싸움을 하게 만드는 근본이 되기도 한다.
 
결국 이런 일들이 원인이 되서 큐슈의 강제 노역소까지 끌려가게 된다. 그는 여기서도 조선인 노무자들을 못살게 구는 일본인들을 손봐주고 형무소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1945년 5월 그의 나이 33세에 후줄근한 모습으로 신의주로 돌아왔고 8월 해방을 맞이하게 된다.
 
십대 막판에 목숨을 건 압록강 밀무역, 스물에 들어서는 거센 격랑을 일으킨 중국대륙 방황 그리고 고꾸라 형무소의 징역살이.
 
10년 동안 중국 대륙을 넘나들며 온갖 주먹 신화를 만들어 온 그가 1945년 8월 한여름을 신의주에서 맞이한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그의 주먹 인생을 극적으로 전환 시키는 계기가 된다.
 
해방 직후 신의주에서 국경 수비대 치안대장을 맡아 머물었던 일 년 남짓한 생활동안 누구보다 공산주의의 실상을 가까이에서 목격한 체험은 월남한 뒤부터 정부 수립 때까지 반공전선의 최일선에 그를 세워 놓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주먹 인생 중 가장 보람찬 기간이 이 시기였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주먹 하나하나가 이 나라의 건국에 보이지 않게 이바지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해방공간에서의 깡패들은 무소불위의 힘을 자랑했다. 항상 혼란의 시기에는 그들의 힘이 막강해진다는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이 시기의 깡패들은 좌우익 대립 속에 정치와 밀착하기 시작했다.
장충동 정치테러 사건을 비롯, 4.19를 촉발시켰던 고대생 습격사건 등 이 시기의 주먹들은 정치인들의 하수인 역할을 했다.
 
김두한이 대한민청 감찰부장 등을 역임하면서 정치일선에 뛰어들자 주먹세계의 판도는 급격히 변했다.
 
명동과 동대문이 팽팽한 힘의 균형을 이루며 주먹계의 두 축을 형성했다.명동은 만주와 이북에서 활동했던 주먹들, 이성순(시라소니), 이화룡 등이 포함돼 있었고 동대문에는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등이 있었다.
 
그러나 충정로 도끼사건으로 이승만은 깡패들을 잡아넣게 되고 이 와중에 명동은 완전히 무너졌고 동대문만 살아남게 됐다.
 
동대문사단이 '권력의 우산' 속에서 비를 피한 것이다.
동대문의 보스 이정재는 야망이 대단했다. 대권까지 노렸던 이정재는 전국대회에서 세 번 우승한 탁월한 씨름꾼. 그의 손에 잡히면 어느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힘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는 자유당정권의 2인자 이기붕과 손을 잡으며 정치판에 뛰어든다.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키기 위해 국회에 난입,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개헌 통과에 한 몫을 했던 이정재는 장충동 테러 사건(야당 발기인대회 방해 사건)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이정재와 시라소니는 한 때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고 했었던 악연이 있는 관계다. 이정재로부터 습격을 당한 시라소니가 거의 죽음 직전에서 살아난 후 오직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온몸의 뼈가 부서졌던 그 끔찍한 고통의 세월을 견뎌낼 정도로 이정재를 향한 시라소니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예배당 마룻바닥에 쓰러져 예수의 말씀에 감명 받아 눈물을 흘릴 때도 다른 사람은 다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도 이정재 만은 그럴 수 없다고 몸부림쳐 온 그였지만 , 군사혁명 직후 중부경찰서 유치장에서 7년 만에 대면한 이정재를 그는 용서했다.
 
7년 전 자신의 린치사건으로 다시 잡혀 들어온 그에게 그가 한 말은 “용서고 뭐고 있겠소? 다 지난 얘기지.... 우리 이 감방을 나가면 정말 새사람이 되어 봅시다.”였다.
 
감방에서 나온 시라소니는 그 후 신앙생활에만 전념했다. 건달세계와 손을 끊고 오로지 기독교인으로서 종교적 생활만 고집하며 살다가 서울 금호동의 다 쓰러져 가는 판잣집에서 타계했다. 그가 죽었을 때, 남긴 재산이라곤 오직 가난과 성경책과 손때 묻은 빛바랜 사진첩이 전부였다.
 
 
[이 게시물은 SVT님에 의해 2014-04-11 12:18:00 [포토 NEWS]에서 이동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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