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시간들 (36) - 나쁜 역은 절대 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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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시간들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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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배역은 절대 사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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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들어서서 나는<결혼조건>과<로맨스빠빠>외에,
다른 몇 편 드라마에서 가까스로 주연으로 발돋움하면서,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긴장하던 무렵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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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도 얼마 남지 않은 11월 30일 월요일,
거리의 보도에는 가로수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고,
산의 나무들도 잎이 떨어져 줄기만 앙상하게 몸을 드러내는,
쓸쓸한 계절의 전형적인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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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극 배역표는 녹음하기 한 2, 3일 전,
연출계 칸막이 나무판에 붙여놓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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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본인에게는 새로 나가는 어느 작가 작품에 배역이 있으니,
어느 날 몇 시까지 집합이라고,
제작진행 맡은 사람이 미리 구두로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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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직접 전화로 부탁하는 예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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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은 KBS 연말을 장식할 매일연속극,
한운사 작 박동근 연출<어느 하늘 아래서>의 첫 회 연습 날,
일요일만 빼고 매일 저녁 7시 40분부터 20분간 방송되는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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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은 최무룡과 정은숙.
최무룡씨 스케줄 때문에 그랬는지,
드라마 연습 팀은 아침 출근 시간에 일찍 연출계에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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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스타 정은숙씨는 여전히 방송계에서는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확고부동한 주연의 위치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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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작가든지 정감 넘치는 애정물의 여주인공에는,
일단 정은숙을 먼저 떠올렸으며,
그녀 스케줄이 맞지 않을 경우에 한해, 꿩 대신 닭으로 다른 성우를 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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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숙이가 있는데 내가 할 역이 뭐가 있을까 궁금히 여기면서,
나는 아침 집합시간에 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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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정은숙은 미도파백화점에서 새로 구입한 미제 의상 차림이었다.
잿빛 상의는 기계로 곱게 짠 스웨터로, 터틀넥에는 흰색 줄무늬가 있었으며,
동일한 색의 모직 타이트스커트는 무릎 아래 약간 내려오는 길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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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볼륨 있는 가슴과 하얀 피부, 쪽 고른 다리,
머지 않아 눈이 내릴 계절과도 색감이 어울려,
그 의상을 입은 사람의 폼이 고상하면서도 품위 만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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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숙녀용 국산 스타킹도 좋은 게 생산되지 않고,
우산까지도 외제로 해결하던 시절,
국산 기성복은 디자인이나 봉제술이 떨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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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녀들은 양장점에서 직접 맞춰 입거나,
지갑사정만 허락한다면,
백화점에서 외제를 구입하는 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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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늘 아래> 연습팀은 원형 연습테이블을 중심으로 둥글게 앉았다.
대본을 받아들고 배역을 아무리 훑어봐도 내가 할만한 역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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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 박동근씨는 깡마르고 조그마한 체격에,
눈 표정이 착하디 착한 40대 후반의 영문학자.
그분 연출의 다른 연속극에서 나는 여동생 역으로 출연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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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운사 작 새 연속극은,
6·25전쟁으로 인한 젊은이들 사랑의 상처를 그린 내용이라는,
연출자의 간단한 작품 설명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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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서 연출자는 다른 연기자들한테 다 배역을 정해 준 다음,
나한테는 제일 마지막에,"윤미림은 노파, 중요한 역이야!"하는 말이,
쾅! 하고 무거운 돌덩어리처럼 내 머리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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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로먄스빠빠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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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산 속의 노파라는 것 같았는데,
내 귀에 걸려 있는 말은"노파"라는 단어 한 마디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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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고 노파를 하라고?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골이 팽 돌고 피가 싸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대본을 내려다보는 척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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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기증 때문에 눈앞이 자꾸 뿌옇게 흐려져,
대본의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이 몸이 막 떨려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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