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시간들 (37) - 노파역은 죽어도 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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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픔의 시간들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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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파역은 죽어도 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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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역을 배정 받고 심한 모욕감을 느끼며 당황한 내 머리는
한 동안 여러 가지 생각으로 뒤엉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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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파 말투가 입에 배어
<청실홍실>의 주연 자리도 내놓는 수모를 겪었었다,
이제 겨우 젊은 사람 말투를 되찾고 있는 중요한 시점에서
또 노역으로 주저앉으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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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는 그 배역을 하지 말아야 하겠는데,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배역 거절은 성우들에게는 거의 터부시 돼 있어서,
방송국을 그만 둘 각오가 아니라면,
주는 배역을 안 하기도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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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연출자든지 드라마 배역이 정해지면,
그 배역표를 일단 이상만 연출계장에게 보이고
먼저 승낙을 받는 게 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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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도<어느 하늘 아래>의
윤미림 노파 역은 시정되지 않았던 것.
전후좌우 어디를 둘러봐도,
나는 배역에 대한 불만을
어느 누구한테도 호소할 곳이 없는 연출계,
연출계에서 고립무원의 연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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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정은숙 보기도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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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떨리는 가슴으로 드라마 대본을
한참 내려다 보고 있다가, 연출계를 나갔다.
나가 봐야 갈 곳이 없으니까 여성전용 화장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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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벽면의 큰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속상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창피하고 기분 나빠 자꾸 후우 ― ! 후우 ― !하고 한숨만 내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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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낮 남에게 선택만 당하는 방송 출연 그만 두고,
나도 이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사람다운 대우를 받으며 살고 싶다~~~!
간절한 소망이 내 안에서 부르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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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잘못 들어선 길,
그러나 다른 재주도 없어 이 일을 당장 그만 두지도 못할 처지라면,
하는 날까지는 꾹 참고 연기를 인정받도록,
더 열심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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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고쳐먹고,
나는 다시 연출계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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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 다른 연기자들을 바라보고 앉아 있자니,
나만 소외된 외톨이처럼 느껴져,
조금 전 화장실 거울 앞에서의 결심은 다 어디로 사라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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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 또 불이 일어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다시 몸을 일으켜 또 화장실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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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연출계와 화장실 사이를 용무도 없이,
반 실성한 여자처럼 나는 계속 들락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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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치 빠른 최무룡 선배님이
네 심정 알만 하다고, 연습테이블 맞은 편에서
자꾸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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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는 불편해진 정은숙이 보다못해 화장실로 내 뒤를 쫓아와,
 하얀 얼굴을 내 눈 앞에 바짝 들이대며,
 어린애 달래는 듯한 어조로, 속삭이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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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내가 주연해서 그래?"
"아냐!"
나는 펄쩍 뛰며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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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잘못 없는 친구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
정말 자존심 상해 성우 노릇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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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태어난 내가 불쌍했다.
이런 꼴 당하지 말고 얼른 다른 방면으로 나가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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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에 들어가서도 나는 마이크에서 멀리 떨어져,
누구 목소리인지 분간 못하게
개미소리처럼 흐릿하게 대사를 처리해버렸다.
내 연기가 마땅치 않으면 연기자를 바꾸라는 시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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엎드려 절 받기 식의 나의 그런 속보이는 반항은 효과가 없지 않아,
중요하다던 그 배역은 그 날 이후 다시는 등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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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나는 그 드라마에 더는 관심도 갖지 않았으므로,
다른 연기자가 대신 했는지도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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