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시간들 (38) - 좋은 작품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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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시간들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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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작품 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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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연말을 노파 역이라는 서글픈 해프닝으로 보낸 나는,
1960년 새해가 되어도 여전히 좋은 배역을 바라며,
바람이 매섭게 몰아치고 눈이 펑펑 쏟아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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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휴일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퇴계로에서 버스를 내려,
부르는 사람도 없는 남산 중턱 KBS에 허덕허덕 기어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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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연출계 한 귀퉁이에 진드기처럼 꾹 눌러앉아
안테나를 귀에 높이 달고,
새로 나갈 드라마 정보 탐색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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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작품은 방송 나가기 전부터 평판이 좋았다.
어떤 작품이 좋다는 화제가 연출계를 휩쓸면,
나는 드라마 작품 선정을 맡은 문예계에도 슬쩍 들려
그쪽 의견도 귀동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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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4일 월요일 아침, 방송국에 나갔더니,
일요일 4월 3일자<주간방송>얘기를 하며 연출계가 웅성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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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방송극 백만환 현상모집에 기가 막힌 작품이 당선됐다는 것.
그것은 서울대 철학과 재학중인 김기팔 작<해바라기 가족>이었다.
22세 철학도의 당선소감도 인상적이었다.
<주간방송> 1960년 4월 3일자 6면에<독백>이라는 당선소감에
다음의 내용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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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다는 것이 어려운 줄이야 옛날에 알아버렸는데도
       .나는 살고 싶었다. 
        .이 샘솟듯하는 삶의 의욕….나는 나를 구제하고 싶었다.
        .천지가 아득할 정도로 앞이 막혔을 때 나는 기적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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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의 기적은 멋지게 이루어져 방송계를 강타한 것이다.
화제만발의<해바라기 가족>첫 회가 방송 나가는
1960년 4월 11일 월요일,
오후 2시가 지나도록 그 작품은 연습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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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연할 여자 성우가 연락이 닿지 않아 큰일났다고 하면서,
연출계 직원들이 여기저기 전화를 하고, 
연출자 박동근씨도 긴장한 표정으로 
전화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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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게 통화가 된 정은숙은, 안양에서 영화녹음 중이어서,
죄송하지만 연습에 대올 수 없다는 답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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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때 밤 10시 15분부터 나가는,
연속낭독 이효석 작<푸른하늘 끝없이>를 녹음하려고,
연출계에서 음악담당 손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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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연습하고 녹음을 하자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다급해진 연출자가 내 눈치를 살피면서 나한테 다가와,
대본으로 내 손을 살짝 건드리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거 해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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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숙을 그렇게 열심히 찾던 사람들이,
약간은 미안하셨던지 박동근씨는 다른 때와는 달리,
하겠느냐고 내 의향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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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싫어요!"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저으면서 역시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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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 나쁘거나 그런 건 아니고,
처음부터 나한테 차례 올 배역이 아니어서,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 안 하겠다고 한 것뿐이었다.
그러자 연출자는 아무 말 없이 사무실을 나갔다.
아마 연극 쪽 누군가
당신이 잘 아는 연기자를 찾아보려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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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이 여의치 않았던 모양으로,
조금 후 다시 들어온 그 분은 내 얼굴을 흘끔 쳐다보더니,
또 나한테 와서 이번에는 대본을 내 앞으로 내밀면서,
사정하듯이 그러나 책망조로 부탁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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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지 말고 해!"
그분의 표정이나 어조에는,
삐치지 좀 말아라! 하는 감정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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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친 게 아니라 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서 싫다고 한 것뿐이었다.
뭐, 주연 1순위도 아닌 나야 그 정도 하찮은 대우는 늘 겪어왔던 터,
새삼스럽게 골 낼 처지도 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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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계장 이상만씨와 다른 직원들이 보고 있는데,
시간은 자꾸 지나가고, 기분은 내키지 않았지만
안 한다고 버틸 수만도 없어,
처량한 기분으로 나는 대본을 받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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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주인공은 최무룡씨라고 하더니 섭외가 안 됐는지,
다른 고참 연기자가 맡았다. 그렇게 해서 불야불야 연습을 끝내고,
그 날 저녁 7시 40분 방송 나가기 직전에 녹음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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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성세대인 아버지와 전후(戰後) 자식들 세대 사이에 얽히는, 
뼈에 사무치는 증오와 갈등을,
가정교사 미원이 보고 느낀 대로
매회 소개하는 형식으로 드라마는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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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동요가 적고 이지적인 성격의 가정교사 역은,
성격 설정을 특별히 할 필요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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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다리 건너 배역을 맡게 된 실제 내 기분 그대로,
속에 맺힌 울적함을 토해내듯이 대사를 처리하면,
고뇌하는 젊음이 저절로 발산되도록, 극의 흐름이 강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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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작품은 운명이 가구해,
3·15 부정선거가 4·19로 이어지는 거센 정치풍랑 때문에
6회까지 나가다가 꽤 여러 날 중단된 다음
다시 방송되는 수난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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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방송 인기는 묘한 기류를 타고 흘러갔다.
<해바라기 가족>의 주연으로 출연하고 나자,
 나는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고뇌하는 젊은 지성 역의 선두주자로 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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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방 시대를 맞아, 주연의 간판을 달고,
한 동안 각 방송국을 염치없이 누비고 다니게 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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