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의 시간들 (48) - 아나운서이야기 4 - 빛과 그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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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의 시간들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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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이야기 4 - 빛과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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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아나운서들의 잘못된 처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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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계 근무는 여자 아나운서였다.
그러나 스스로 마음이 내켜서 와 있는 것도 아닌 타부서 직원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연출계 사무실에
매일 아침부터 하루의 녹음이 끝나는 퇴근시간까지
와 있다는 것은 피차 또 다른 불편을 낳았다.
교대로 여자 아나운서가 보자기에 책을 싸들고 와서,
 아침부터 연출계로 나와
드라마 녹음에 대기하고 있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녀들은 하루의 긴 시간을 주위 직원들하고
일체 대화 없이 계속 책만 읽다가
그때그때 드라마 소개멘트를 녹음하러 
스튜디오에 갔다 오는 것이 하는 일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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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성우들은 아래층 연출계에서 복도 맞은 편에 있는
연습실이나 때로는 건물 외부의
임시 건물 퀀셋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수시로 연출계를 드나드는 연기자들은 표현에 꾸밈이 없고
움직임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그런데 연출계에 가보면 전에 없이 공기가 소통이 안 되어
무슨 사고라도 일어난 집처럼 무거운 침묵으로 차 있었다.
자기네 방에서도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연출계 직원들이나 연기자들하고
편안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책만 읽고 앉아있는 여자 아나운서들의 모습은
보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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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방송국장 지시에 어쩔 수 없이 따르기는 해도
그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무언의 항의 표시였다.
아나운서가 연출계에 근무하게 되면서
물과 기름처럼 연출계 사람들과  융화가 되지 않아
분위기는 썰렁해지고
아나운서는 드라마제작의 협조자라기보다는
나날이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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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에 연출계에 와 있으면 어떤 내용의 드라마가 나가는지,
그런 데는 관심을 갖지 않고,
방송국장님 조치에 반기를 들고
말없는 시위만 하며  연출계 분위기를 무겁게 해놓으며
독서로 일관하고 있는 여자 아나운서들의 태도가
못 마땅하다 못해,
제발 그만 좀 왔으면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방송국에 책 읽으러 왔나? 드라마 소개멘트는
밤낮 천편일률로밖에 못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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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사이, 연출계 직원들이나 드라마 제작팀들은
차라리 아나운서가
연출계에 오지 말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하여간 그런 상태로 얼마를 지냈는지, 
1961년 5·16이 터지고, 조흔파 국장님은
집필에 전념하기 위하여 방송국을 떠나시고,
다른 대책도 세워지지 않은 채로
아나운서의 연출계 근무는 아예 없었던 일로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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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가 연출계에 안 오니까, 연출계는
어떤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있다가 해방된 것처럼
시원해지는 분위기였다.
1960년대가 되어 고참 유명 아나운서들이
신설 민영방송국으로 중임을 맡아 많이 KBS를 떠난 다음
후배아나운서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며
활동영역이 넓어졌다.
그 이후 일부 남자 아나운서들의 드라마 제작 시
소개멘트 녹음에 무성의함은 점점 더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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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에 왔다가 잠깐 동안도 기다릴 수 없다며
멋대로 가버리는 아나운서일수록
자기가 앞뒤 소개를 넣으려는 드라마가
희극인지 비극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연출자에게 "이건 어떤 드라마입니까?
소개멘트는 밝게 해야 할까요? 아니면
차분하게 해야 할까요?" 하고
물어보는 아나운서는 본 일이 없었다.
시실 그만한 역량이 있는 아나운서는 몇 명 되지도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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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다만 자기들이 KBS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입사한 아나운서이므로
그 아나운서 간판만 달고 있으면
노력 없이 능력이 저절로 향상되는 것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극의 흐름을 이해하여 호흡을 맞추려는 노력과는
동떨어진 행동, 마치 자기들은 아나운서니까
드라마 제작진으로 하여금 아나운서실로
무수히 부르러 다니게 하는 연구만 하고 있는 듯한
그들의 불손한 태도는 참으로 보는 사람들을
역겹게 만들었다.
꼭 드라마 팀을 상대로 아나운서 위신 높이기 연습이라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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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태도가 좋건 나쁘건 간에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방송이었다.
전문 방송인들의 귀는 속일 수 없었다.
순순히 녹음에 응하지 않고
유난히 몇 번씩 데리러 가게 만들며
속을 썩이는 사람일수록 드라마 앞뒤 소개 넣는 것을 들으면
말에 정감이나 생명감이 담기지 않고
그저 문자를 나무토막처럼 밋밋하게 읽어버렸다.
그래도 연기자가 아닌 타부서 직원이라
연출자는 일체 다른 주문을 달지 않았다.
아나운서가 더 이상의 말썽 부리지 않고
소개멘트를 넣었다는 것만
다행으로 여기고 불만스러운 대로 넘어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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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이 끝난 다음, 하도 여러 번 녹음에 지장을 주는
아나운서를 부르러 갔다 온 신인 성우에게
선배연기자가 물어본다.
"아까 그 남자 아나운서, 굉장히 바쁜 것처럼 하고
몇 번이나 나가버렸는데,
아나운서실에 가서 뭐하고 있습디까?"
"뭐…, 그냥 앉아서, 우두커니 창 밖을 내다보고 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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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무성의하고 무례한 아나운서가
세 번 네 번 부르러가야 오는 것을 바라보면서
드라마 팀들은 속으로 각자 생각은 다 하고 있었다.
저 젊은이는 아나운서의 본분이 겸허한 자세로
방송을 성의 있게 잘하는 것이 아니라
으쓱대고 잘난 척하는 게 본업인 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한참 잘못 됐다. 누구 앞에서 잘난 척을 하나?
5년 10년 그 이상의
까마득한 방송계 선배인 방송인들 앞에서
잘난 체를 해보겠다고?
도대체 드라마 제작에 저렇게 비협조적인 아나운서가
무엇 때문에 필요한 거야?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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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나운서는 으스대는 양이 불쾌하다 못해
숫제 우스웠다. 정말 참아주기 힘들 정도로 맡은 일에
무성의하게 구는 어떤 젊은이는
자기 사무실에 가서 입도 뻥긋 못할 만큼
드물게는 스튜디오에서 망신당하고 가는 일도 있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여러 민방을 매일 순회하며 녹음을 해봐도
아나운서가 늦게 와 드라마 녹음이
지연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남산방송국 터가 세서 그러기라도 한 것처럼
꼭 남산의 KBS만 가면 아나운서가 제 때에 잘 안 오거나
왔다가도 조금도 기다릴 수 없다면서
녹음 안하고 금방 나가버려
드라마 팀이 골탕을 먹는 일이 빈번히 발생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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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잘못하는 일 없이 괴롭힘을 당하는 일이 반복되면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강구하기 위해서라도
자기를 괴롭히는 상대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비판하게 된다.
TV드라마에서는 프로의 앞뒤 소개는 자막 처리되므로
작가나 연출자와 출연자들의
소개가 별도로 필요하지 않으나,
귀로만 듣는 라디오 드라마에서는
작가와 등장인물, 관계 스태프들의 소개는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요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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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KBS에서 일부 젊은 남자아나운서들이
거의 매일이다시피
드라마제작에 하도 불편을 주므로, 연기자들이나 연출자들은,
아나운서가 드라마에 특별한 소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나운서 식 딱딱한 낭독 투가
드라마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닌데
무엇 때문에 굳이 그들에게 앞뒤 소개를 맡겨야 하는가, 하는
강한 의문을 갖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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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은 자연스러워야 한다.
우리는 아무도 일상대화에서 목청을 가다듬어
발음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가며 말하지 않는다.
스포츠중계는 어떤 발음이라도 상관없겠으나,
뉴스 전달과 쇼프로 진행에서 아나운서들의 다듬어진 발성,
강한 발음과 억양은
듣는 사람들의 귀를 여간 피곤하게 하는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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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히 소수의 아나운서를 제외하고는
오락프로에서 연예인들처럼 가볍게 가볍게 넘어가지 못하는
아나운서들의 진행이 무겁고 재미가 없어
금방 피로를 느끼게 하는 것은
그들의 너무 좋은 목소리에 더하여
지나치게 정확한 발음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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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회나 오랫동안 내려오는 관행은
일종의 타성에 의해 움직인다.
그 타성을 과감하게 타파하는 데는
진지한 연구와 시간과 용단이 필요하다.
드라마 파트에 소속된 사람들이
방송극의 앞 뒤 소개를 누가 넣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심사숙고하여
다각도로 검토한 끝에, 드라마 제작에는 아나운서들 억양이 
부적격이라는 결론을 내리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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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가 드라마를 소개해 오던 오랜 관행을 깨버리고
드라마 소개의 새 틀을 마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드라마 소개멘트는
아나운서에서 연기자로 대체되었다.
먼저  민간방송국에서 드라마 앞뒤 소개에서
아나운서를 배제하고 KBS가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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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서야 아나운서를 부르러 가는
불편하고 불쾌한 일을 겪지 않고도
안심하고 편안하게 녹음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고,
드라마 내용과 상관  없이 한 가지 방식으로 아나운서들처럼
무겁고 딱딱하게 넣는 소개멘트가 아니라,
연출의 지시를 받은 연기자들이
극의 흐름에 상응하는 감정을 살려가면서
드라마 정서에 맞는 소개를 하게 되었다.
라디오드라마에 있어서는 그 길의 전문인 성우들 이상으로
잘 할 수 있는 능력자가 없다는 것을 증명한
바람직한 개혁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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