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7 휴전특집] 절대로 집에 올 수 없는 한국 전쟁 ‘죄수들’의 자식들


  

입력 2020.7.28.

BBC 원문 2020.7.27.

 

[시사뷰타임즈] 1953, 한국 전쟁이 종료됐을 때, 5만 명 정도의 한국인 전쟁 죄수들은 북한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뜻과는 반대로 강제로 노동을 했다. 일부는 죽임을 당했다. 이제 이들의 자식들이 인정을 받기 위한 싸움을 하고 있다고 BBC 한국의 김수빈이 쓰고 있다.

 

이씨()는 제아무리 열심히 노력을 해봐도, 자신의 아버지와 남자 형제를 죽인 처형관들이 세 발을 발사한 후 그 뒤 어떻게 됐는지 회상할 수가 없다. 30년 전의 일이고, 이씨는 당시 30대였다.

 

이씨는 처형 직전에 일어났던 일은 잘 기억하고 있다. 보위부 장교들이 북한에서 아오지라고 부르는 오지 마을에 있는 운동장으로 이씨를 끌고 갔다. 이씨는 목제 다리 밑에 앉아서,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이씨는 알지 못했던- 기다리면서 강제로 앉아있어야 했다.

 

군중이 불어나면서 트럭 한 대가 와서 정차하더니, 두 명이 트럭에서 호송을 받으며 내렸다. 이씨의 아버지와 남자 형제였다.

 

보위부 장교들은 아버지와 남자형제를 말뚝에 묶어 놓고, 이 두 사람을 국가의 반역자, 간첩 그리고 반동분자들이라고 불렀습니다.”라고 이씨는 최근 BBC와의 대담에서 말했다. 이씨늬 기억이 중지된 순간이었다. “전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제 턱이 빠졌습니다. 안 이웃 사람이 저를 집으로 데려가서 턱을 맞춰주었습니다.”



잊혀진 죄수들

 

이씨의 아버지는 과거 5만명 정도의 전쟁 죄수들 중 한 명이었으며 한국 전쟁이 종료될 때 북한에 있었다. (전쟁이 끝나자) 죄수였던 사람들은 본인의 뜻과는 반대로 북한 육군 부대로 재편됐고, 남은 여생들을 재건 현장이나 광산에서 강제로 일을 해야 했다.

 

1953727, 휴전 협정이 조인됐을 때, 한국 병사들은 곧 죄수 교환이 있을 것이므로 집으로 보내지게 될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휴전 협정이 있기 한달 전, 한국 대통령 리승만은 정전을 거부하기 위해 북한 죄수들 25천 명 이상을 풀어주었다. 리승만은 유엔군이 한국의 이름 하에 나라가 재통합되도록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구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조치가 한국 병사들의 한국으로의 송환을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이라고 믿는다.

 

북한은 억류시키고 있었던 죄수들 중 아주 조금만 보냈다.

 

곧 한국은 대체적으로 이 사람들을 잊었다. 그 이후로 여러 해가 지나며, 한국 대통령 3명이 북한 지도자들을 만났지만, 전쟁 죄수에 대한 말은 의제에 오른 일이 없었다.


북에서, 이씨 가족들은 혈통이 안 좋은 것으로 봤다. 이씨의 아버지는 남한에서 태어나 한국 전쟁에서 북한을 상대로 유엔군 옆에서 싸웠는데, 이 자체가 감점 요인이었다. 가족들의 낮은 사회적 입지는 등골이 휘는 일거리들 및 어두운 전망쪽으로 이들을 격하시켰다. 이씨의 아버지와 남자 형제는 석탄 광산에서 일했는데, 이곳은 치명적인 사고들이 정기적으로 일어나는 곳이었다.

 

이씨 아버지는 니리기 제통합 되면, 어느 날엔가는 집으로 갈 것이라는 꿈을 남몰래 품고 있었다. 하루 일이 끝난 뒤, 그는 자식들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흫 해주곤 했다. 때때로, 그는 자식들에게 한국으로 탈출하라고 재촉하기도 했다. “한국에선 내게 메들(메달)을 줄 것이고 너희들은 영웅의 자식들이라는 대우를 받게될 것이다.”라고 그는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씨의 남자 형제가, 하루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아버지가 말했던 것을 흘렸다. 친구들 중 한 명이 이 사실을 당국에 신고했다. 입단속이 문제가 되어, 이씨의 아버지와 남자 형제는 죽었다.

 

2004, 이씨는 기어코 한국으로 탈북했다. 아버지의 오류를 알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는데, -아버지의 조국은 아버지를 영웅으로 보지 않았다. 전쟁 죄수들이 집에 갈 수 있게끔 해 준 것은 거의 없었다.

 

북한에 남겨진 병사들은 고통을 받았다. 이들은 북한이라는 국가의 적으로 보였고, “괴뢰 군에서 싸웠던 남자들이었기에, ‘성분이라는 북한의 사회적 계급제도 중 가장 낮은 단계에 할당됐다.

 

이러한 입지는 세습 및 유전되는 것이었기에, 이런 사람들의 자식들은 고등교육을 받거나 자신의 직업을 선택할 자유 등이 허락되지를 않았다.

 

최씨는 유명하고 잘 나가는 학생이었었지만, 대학교에 갈 것이라는 이 여자의 꿈은 아버지의 성분 때문에 불가능 했다. 최씨는 한 때 자신의 아버지에게 고함을 지르면서 아버지는 반동분자 쓰레기야! 아버지네 나라로 가지 그래요?”라고 했었다.

 

최씨의 아버지는 딸에게 맞받아 고함을 지르진 않았지만, 맥없이 딸에게 우리들의 나라는 너무 약해서 북한에 있는 과거 한국 병사들을 송환시킬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8년 전, 최씨는 자신의 가족들을 내팽개치고 한국으로 도망쳤다.

 

우리 아버지는 한국에 오고 싶어 하셨어요라고 최씨는 말하면서 내가 내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가고 싶어하는 곳으로 나도 가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아에 없었다, 이것이 내가 내 아들, 내 딸 그리고 내 남편을 내팽개쳤던 이유이다.”

 

최씨의 아버지는 지금은 죽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서류상, 이 여자에겐 아버지란 것이 없는데, 공식 서류엔 그가 한국 전쟁 전투에서 죽었다고 적혀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뼈를 고국으로

 

손명화()는 아직도 40년 전 임종 시 아버지가 했던 마지말 말들을 분명하게 기억한다. “만일 네가 한국에 가게된다면, 반드시 내 뼈를 갖고 가서 내가 태어난 곳에 묻거라

 

손씨의 아버지 김해 -부산에서 18km 거리에 있는- 출신 한국군 병사였다. 북에서 몇 십년 전, 아버지는 석탄 광산 및 벌목 공장에서 강제 노역을 했으나 허용된 것은 암으로 죽기 10일 전, 한국으로 가도 좋다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딸 손명화에게 네 조부 조모도 못 뵙고 북한에서 죽자니 너무 괴롭다. 한국에 묻히기라도 하는 것이 좋지 않겠니?”라고 했다.

 

손씨는 2005년에 탈북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해를 북한에서 빼내기까지는 8년이 걸렸다. 손씨는 자신의 자매들에게 아버지의 무덤에서 유해를 파내어 그 유해를 중국에 있는 중개인에게 가져와 달라고 부탁했다. 옷 가방 3개가 필요했다. 손씨의 친구 두 명이 같이 가주었지만, 아버지의 유골을 갖고 온 것은 바로 손씨였다.

 

손씨는 아버지가 송환되지 못한 병사였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1년 이상동안 항의시위를 했고, 마침내 아버지의 유해를 2015년 국립묘지에 묻을 수 있었다.

 

전 드디어 딸로서 제 의무를 수행했다고 생각했어요.“라고 손씨는 말하면서 그러나 아버지가 북한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라고 했다.

 

손씨는 나중에 매장을 위해서 끔찍한 댓가를 치루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북한에 있는 손씨의 자매들은 정치점 수용소로 가있었다.

 

손씨는 현재 한국 전쟁 전쟁포로(POW) 가족 협회를 이끌고 있으며, 이 단체는 집으로는 아예 오지도 못한 한국 병사들의 대략 110개 가족들에 대해 더 나은 대우를 해달라고 싸운다.

 

DNA 검사를 통해, 손씨는 자신의 아버지의 딸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고, 이것은 아버지가 받지 못한 월급을 위한 소송에서 필수적이었다. 북한에 있는 한국군 포로들이 어렵사리 한국에 온다 해도, 전쟁 죄수들의 자식들은 공식적으로 인정받지를 못하며, 군대 월급도 받지 못한 많은 죄수들이 죽었다고 간주되고 있거나 전쟁기간 중 직무에서 벗어났거나 아니면 단순히 행방불명으로 취급한다.

 

전쟁 포로들 중 한국으로 탈출한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못받은 급료를 받았고, 북한에서 포로로 죽은 사람은 그 어떤 보상 대상도 되지 아니한다.

 

1, 손씨와 이 여자의 변소사들은 헌법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하면서, 북한에서 죽은 전쟁 포로 가족들이 불공평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 및 정부가 이 전쟁 포로들을 송환시키기 위한 일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으면서, 아예 되돌아 오지 않은 것이 전쟁 포로들 탓으로 돌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전쟁 포로의 자식으로 태어난 것이 너무 슬프며, 한국으로 온 뒤에까지 무시를 당하는 것이 더욱 고통스럽습니다.“라고 손씨는 말했다.

 

만일 우리가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면, 너무도 끔찍했던 전쟁 포로들의 삶과 그들의 자식들은 모두 다 잊혀지게 될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의 이름은 -이 이야기를 기고한 분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바꿨습니다. 삽화: 데이비스 술야.

 


The children of Korean War prisoners who never came home

 

27 July 2020

 

When the Korean War ended in 1953, about 50,000 South Korean prisoners of war were kept in the North. Many were forced into labouring jobs against their will. Some were killed. Now their children are fighting for recognition, writes BBC Korea's Subin Kim.

 

No matter how hard she tries, Lee cannot recall what happened after three shots were fired by the executioners who killed her father and brother. It was three decades ago, when Lee was in her thirties.

 

She does remember what happened just before. Security officers had dragged her to a stadium in a remote village in North Korea called Aoji. She was forced to sit under a wooden bridge, waiting for something - she knew not what - to happen.

 

A crowd swelled and a truck pulled up, and two people were escorted off the truck. It was her father and brother.

 

"They tied them to stakes, calling them traitors of the nation, spies and reactionaries," Lee told the BBC in an interview recently. That's the moment her memory falters. "I think I was screaming," she said. "My jaw was dislocated. A neighbour took me home to fix my jaw."

 

Image copyrightICRC / HANDOUT

Image caption

Many families have split as a result of the Korean War, which is not technically over

 

The forgotten prisoners

 

Lee's father was one of about 50,000 former prisoners of war who were kept in the North at the end of the Korean war. The former prisoners were regrouped against their will into North Korean army units, and forced to work on reconstruction projects or in mining for the rest of their lives.

 

When the armistice was signed, on 27 July 1953, the South Korean soldiers had assumed there would soon be a prisoner exchange and they would be sent home. But a month before the armistice, South Korean President Syngman Rhee unilaterally freed more than 25,000 North Korean prisoners, in order to sabotage the ceasefire. He wanted UN forces to help him reunite the country under South Korea. Many believe the move made the repatriation of South Korean prisoners more difficult.

 

The North only sent back a small fraction of the prisoners it had taken.

 

Soon South Korea largely forgot the men. In years since, three South Korean presidents have met North Korean leaders, but the prisoners of war were never on the agenda. 

 

Image copyrightAFP

Image caption

Critics say Syngman Rhee was wrong to free North Korean soldiers

 

In the North, the Lee family were viewed as bad stock. Lee's father was born in the South and had fought alongside United Nations forces in the Korean War, against the North - a black mark against him. The family's low social status relegated them to backbreaking jobs and dim prospects. Both Lee's father and brother worked at coal mines, where fatal accidents were a regular occurrence.

 

Lee's father harboured a dream of going home one day, when the country was reunited again. After work, he would tell his children stories of his youth. At times, he would prod his children to escape to the South. "There will be a medal for me, and you will be treated as children of a hero," he would say.

 

But Lee's brother, while drinking with friends one day, let slip the things their father would say. One of the friends reported it to the authorities. In a matter of months, Lee's father and brother were dead.

 

In 2004, Lee managed to defect to South Korea. It was then that she realised her father's error - his country did not see him as a hero. Little had been done to help the old prisoners of war get home.

 

The soldiers kept back in North Korea suffered. They were viewed as enemies of the state, men who had fought in the "puppet army", and assigned to the lowest rank of North Korean social caste of "songbun".

 

Such status was hereditary, so their children were not allowed to receive higher education or the freedom to choose their occupation.

 

Choi was a star student, but her dream of going to a university was impossible because of her father's status. She once yelled at her father, "You reactionary scum! Why don't you go back to your country?"

 

Her father didn't yell back, but said to her dejectedly that their country was too weak to repatriate them. Eight years ago, Choi abandoned her family and fled to the South.

 

"My father wanted to come here," she said. "I wanted to come to the place the person I loved the most in my whole life wanted to come but never could. That's why I abandoned my son, my daughter and my husband."

 

Choi's father is now dead. And in South Korea, on paper, she has no father, because official documents say he died in action during the war.

 

Bringing my father’s bones home

 

Son Myeong-hwa still clearly remembers her father's last words on his deathbed nearly 40 years ago. "If you get to go to the South, you've got to carry my bones with you and bury me where I was born."

 

Son's father was a South Korean soldier who was from Gimhae, some 18km (11 miles) away from Busan. In the North he was forced to work in coal mines and a logging factory for decades and only allowed to go home 10 days before he died of cancer.

 

He told Son: "It is so bitter to die here without ever seeing my parents again. Wouldn't it be good to be buried there?"

 

Son defected in 2005. But it took her eight years to get her father's remains out of North Korea. She asked her siblings to dig up her father's remains and bring them to a broker in China. Three suitcases were needed. Two of Son's friends came along, but it was Son who carried her father's skull.

 

Image copyrightSON MYEONG-HWA

Image caption

Son Myeong-hwa protested for more than a year for the recogition of her father's status

 

Son protested for more than a year for the recognition of her father's status as an unrepatriated soldier, and eventually she was able to bury his remains at the national cemetery in 2015.

 

"I thought that I finally fulfilled my duty as a daughter," she said. "But it breaks my heart when I think of him having had his last breath there."

 

Son discovered later that the family paid a terrible price for the burial. Her siblings in the North were sent to political prisons.

 

Son now heads the Korean War POW Family Association, a group that fights for better treatment of roughly 110 families of South Korean soldiers who never came home.

 

Through a DNA test, Son was able to prove that she was her father's daughter - which was essential for her to file for his unpaid wages from South Korea. Even if they manage to escape to the South, the children of prisoners of war are not officially recognised, and many of the unrepatriated prisoners were considered dead, or discharged during the war, or simply missing.

 

Image copyrightYONHAP

Image caption

South Korean President Moon Jae-in at a Korean War anniversary ceremony

 

Only a handful of prisoners of war who managed to escape to the South ever received unpaid wages, and those who died in captivity in the North were not eligible for any compensation.

 

In January, Son and her lawyers filed a constitutional court case, arguing that the families of the prisoners who died in the North had been treated unfairly and that the government had done nothing to repatriate the prisoners, making it responsible for the prisoners who never came back.

 

"We were so sad to be born the children of the prisoners, and it was even more painful to be ignored even after coming to South Korea," Son said.

 

"If we can't recover our fathers' honour, the horrendous lives of the prisoners of the war and their children will be all forgotten."

 

Some names were changed to protect contributors' safety. Illustrations by Davies Surya.

 

[기사/사진: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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