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빌라이 칸


 
원 세조 쿠빌라이(元 世祖 忽必烈, 1215년 9월 23일 ~ 1294년 2월 18일)
 
 몽골 제국의 제5대 대칸(재위 : 1260년 ~ 1294년)이자 원나라의 초대 황제이며, 칭기즈 칸의 손자이다. 본명은 보르지긴 쿠빌라이(몽골어: ᠪᠣᠷᠵᠢᠭᠢᠨ ᠬᠤᠪᠢᠯᠠᠢ, 한자: 孛兒只斤忽必烈 패아지근 홀필렬)이고 묘호는 세조(世祖), 시호는 성덕신공문무황제(聖德神功文武皇帝), 존호는 헌천술도인문의무대광효황제(憲天述道仁文義武大光孝皇帝)이다. 1279년 남송을 정벌하여 중국대륙을 정복하고 금나라와 거란족의 잔당을 토벌하였으며, 고려를 제후국으로 편입 하고, 베트남 북방까지 영토를 확장시켰다.
 
툴루이의 넷째 아들로 경쟁자이자 막내동생 아릭부게, 형인 훌라구와 경쟁하였고, 훌라구 세력을 꺾고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훌라구와 그의 후손들은 대칸의 자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고, 이후 쿠빌라이 와 그의 후손들의 주요 경쟁 세력으로 떠오른다.
 
1271년 국호를 원(元)으로 고치고 대도(大都, 현재의 베이징 시)를 도읍으로 정하였다.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하였으며, 고려·버마·일본 등지에 침공하였다. 그는 색목인(중앙 아시아 인)을 중용하고, 서역에서 오는 문화를 중시하였으며, 티베트에서 라마교를 받아들였다. 서양인을 우대하여 마르코 폴로 등이 입국하는 등, 통일된 다민족국가의 발전을 위해 공헌하였고, 넓은 영토를 차지한 대제국을 완성하여 원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또 한편, 고려를 정벌하고 충렬왕을 부마(또는 제후)로 삼아 속국으로 편입시켰다. 그는 한때 고려와 연합해 일본을 정복하려 했으나 두 차례 모두 태풍으로 실패했다.
 
중국 학자들의 영향
 
쿠빌라이는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툴루이 칸의 넷째 아들이며 몽케 칸의 동생이었다.
 
1251년부터 형인 몽케 칸은 칭기즈 칸의 셋째 아들이자 그의 백부인 오고타이 칸이 계획했던 남송의 정복과 페르시아 정벌을 결심하고, 페르시아 정벌은 쿠빌라이의 다른 형인 훌라구에게 맡겼다. 이때 몽케 칸은 쿠빌라이에게 중국 정벌을 맡겼고, 동시에 중국 정벌에 대한 군사·행정의 전권이 주어졌다. 그는 중국어를 읽거나 쓸 줄은 몰랐지만 중국 사상의 우수함을 일찍 깨닫고 옛 송나라와 금나라 출신 유교학자들을 불러모았다.
 
그의 통치술은 주위 한족 학자들의 영향 아래 형성된 것이다. 그는 이같은 영향 때문에 통치자와 피지배자는 상호의존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고 타고난 도량과 인자함의 폭을 넓혀나갔다. 그는 출정 전 사적으로 여성과 아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말 것, 전쟁터에서 물품을 약탈하지 말 것을 지시했다. 야전(野戰)에서 그는 휘하의 부장(部將)들에게 측근 학자들이 가르쳐 준 교훈, 즉 피정복민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중요하고 또 효과적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것은 정복지의 남자들은 모두 살륙하거나 노예로 삼고, 여성과 아이들은 노비와 노리개로 삼았으며 도시를 황폐화시키는 것이 보통이던 그의 할아버지 칭기즈 칸이나 이전의 몽골 족 정복자들, 혹은 유목 민족 지배자들의 방법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고, 중앙 아시아로 진격한 다른 몽골 족 지도자들에 비해 상당히 자비로운 태도였다. 사실 이민족을 정복한 유목민족, 특히 몽골 족 지도자들은 한 도시를 함락시키면, 대량 학살과 약탈을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정복 준비와 대리국 정벌
 
그는 자신의 사적인 영지인 경조(京兆,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에 행정체제와 보급기지를 갖추었고, 그는 말단의 촌장들에 이르기까지 하나 하나 직접 관리, 감독하였다.
쿠빌라이는 윈난 성(雲南省)에 있던 대리국(大理國)을 먼저 침공하여 남송의 측면을 돌파하는 작전을 썼다. 1253년 가을 그는 군사를 이끌고 출정, 윈난 지방으로 들어와 3,4개월간의 전투 끝에 그해 겨울에 대리국의 수도인 대리성(大理城)을 정복했다. 그러나 정복 직후인 1254년 초 훌라구, 아리크 부케 등이 칸의 세력 확장과 인재 포섭 등 칸의 지위에 오르려는 움직임들을 감지하고 되돌아가자 부장인 우리양카다이에게 이 지역의 위수(衛戍)를 맡겼다. 대도로 들어가 몽케 칸을 알현한 뒤, 1257년 몽케 칸의 지휘 아래 출정에 참여하여 남송 공략을 준비하였으나 1259년 몽케가 갑자기 죽었다.
 
한편 쿠빌라이는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남송의 북방지역의 한 성곽을 포위, 공격하던 중, 몽케 칸의 전사 소식과 형제 중 막내이기 때문에 고국의 방비를 맡았던 아리크 부케가 스스로를 칸에 오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자를 보내 교전 중이던 남송과 휴전을 협정하고 대도로 진격하였다.
 
즉위 초반
 
아리크 부케의 도전
 
1260년 4월 그는 몽골 남동부 상도(上都)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의 지지세력들은 쿠릴타이(Kuriltai, 大會議)를 임의로 개최하여 몽골족 부족장들을 소집, 그해 5월 5일 몽케 칸의 뒤를 이어 만장일치로 쿠빌라이를 칸으로 선출하게 했다.
 
몽골어 외에도 거란어, 여진어와 한자 소양도 있었던 그는 5월 15일 그는 직접 한문으로 포고문을 작성, 자신이 선대 칸의 유언에 의해 제위를 계승했음을 선포했고, 자신이 적법한 계승자임을 발표했다. 그 당시 몽골족은 막내아들이 제위를 계승하도록 제정되어 있었으며, 장자 계승은 후사의 원칙으로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동생인 아리크 부케 역시 몇몇 강성한 지지세력의 도움으로 카라코룸에서 임의로 쿠릴타이를 열어 자신을 칸으로 선출하고 쿠빌라이를 찬탈자라 공격하였다. 후에 쿠빌라이가 가계상 적자이고 합법적인 군주라는 마르코 폴로의 변호에도 불구하고 정통성 시비, 논란은 그의 생전은 물론 죽은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그의 정통성에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심지어 임종 직전의 칭기즈 칸이 당시 어린 아이였던 쿠빌라이를 장래의 칸으로 지목했다는 전설까지 날조되었지만 이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1264년 쿠빌라이는 아리크 부케와의 전투에서 그를 패배시키고 항복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는 항복을 거절하고 끝까지 항거했으나, 아리크 부케는 2년 뒤에 죽었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의 후손들은 계속 그에게 도전해왔고, 쿠빌라이 가문의 내란은 계속되었다.
 
카이두, 훌라구와의 교전
 
반대파의 지도자들 중에는 훌라구와 조카인 카이두도 있었다. 훌라구와 카이두가 각각 추대되자 가문 내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 일찍이 칭기즈 칸은 직접 만인 앞에 오고타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선포한 바 있었는데, 오고타이의 손자인 카이두는 당연히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그는 이 점을 항상 주장하고 다녔고 몽케 칸은 카이두를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카이두는 툴루이와 몽케 칸에 대한 적개심과 쿠빌라이에 대한 적개심을 버리지 않았고 몽골 본국과 투르키스탄의 군주로 이 지역을 통치하다가 1301년에 죽었다. 이어 훌라구를 지지하는 세력 역시 대도 근처에서 몰살시킴으로써 그의 자리에 도전하는 세력을 모두 힘으로 제압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쿠빌라이를 칸으로 인정하지 않는 몽골족 부족장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 즉위 초, 남송을 정벌한다는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그에게 반기를 든 세력은 주로 쿠빌라이가 유목민족의 전통을 버리고 낯선 중국 문화를 수용했다는 사실에 분개하는 몽골족 수령과 원로들이었다.
 
파스파 문자 제정
 
파스파 문자(Phags-pa characters, 八思巴文字)는 1265년 몽골 원나라(元) 국사(國師)인 파스파(八思巴)가 쿠빌라이(세조 世祖)의 명을 받아 몽골어를 표기하기 위해 만든 문자로서, 몽골신자·방형몽골문자라고도 하는데, 파스파의 백부(伯父) 사펜이 처음 고안한 것을 파스파가 개량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정복 활동
 
고려에 대한 정책
 
남송 정벌 계획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남송의 주요 지원 세력인 고려 정벌을 계획한다. 그러나 고려는 쿠빌라이가 보낸 몽골 군사에게 쉽게 항복했고, 쿠빌라이는 고려의 국왕이 이후 원나라 황제나 종실의 부마(제후)가 되는 조건으로 왕실은 유지 할 수 있었지만 원의 제후국이 되었다. 곧 고려 국왕인 충렬이 그의 딸 제국대장공주와 혼인하였고, 이후 고려의 역대 군주들은 원나라의 공주 혹은 종실의 딸과 결혼하여, 원나라의 부마국인 동시에 외손이 된다.
 
이후 쿠빌라이는 고려에게 공물의 양을 줄이는 대신, 두 차례의 일본 원정에 고려의 협력을 종용하였다. 또한 한인(漢人) 학자들을 동원하여 고려로 하여금 성리학(주자학)을 도입하게 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때부터 계속된 원나라의 지배로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제1차 일본 공략
 
1266년 일본에 보내는 친필 국서쿠빌라이는 즉위 직후 남송공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았으며, 1268년 한수의 요충 양양의 포위전을 개시했다.
 
쿠빌라이는 황후 차브이를 섬기는 인물로서 중앙아시아 출신의 상인 아흐마드 파나카티 를 재무장관에 발탁하여 증세를 꾀해 남송 공략의 준비를 진행시키는 한편, 이어서 복속한 고려를 통해 남송과 통상관계를 맺고 있었던 일본에도 몽골에 대한 복속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의 가마쿠라 막부는 이를 거부했고,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본이 연합하여 원나라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 1274년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으로 보냈으나, 쓰시마 섬, 이키노시마, 규슈의 다자이후 주변을 석권하는 것만으로 끝났다. 일본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준비를 통해 원정 준비를 위해 설치한 출선기관인 정동행성과 고려정부가 일체화되어, 새로 속국이 된 고려는 원나라 조정과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남송 공략과 중국 통일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마침내 함락되고, 남송의 방위시스템은 붕괴되었다. 원나라는 병사가 각 성과 도시에서 약탈, 폭행을 저지르는 것을 엄중히 금지시키는 것과 더불어 항복한 적의 장군을 좋은 대우를 해주는 등 남송의 투항군을 아군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각지의 도시는 차례로 원나라에게 항복했다. 1274년 옛 남송의 투항군을 합친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자 방위 시스템의 붕괴된 남송은 이렇다 할 저항다운 저항도 하지 못하고, 1276년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무혈 함락되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북쪽으로 연행되었으나, 그의 아내의 요청으로 그는 몽골 제국의 황족과 같은 예우를 하라 명하였고, 남송의 황족들은 몽골 황족의 예에 따라 정중한 대우를 받았다.
 
그 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하였다. 쿠빌라이는 풍부한 옛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다.
 
1276년 이후 다시 결집하여 저항하려는 여진족을 토벌하고, 만리장성 밖에 있던 거란족의 잔당을 궤멸, 몰살시켜 내몽골과 만주 지역을 평정하였다. 또한 일부 군사를 보내 위구르 족과 티베트를 정벌하였으며, 옛 서하 지역의 부흥 운동 역시 좌절시켰다.
 
월남 침공 실패와 2차 일본 공략 실패
 
그러나 그 후 이루어진 군사원정은 특별한 성과 없이 끝났다. 1281년 다시 일본에 군대를 보냈으나 이번에도 실패로 끝났고, 1285년과 1288년에는 베트남에 침공한 군대가 차례로 패배했다. 그러나 베트남의 북방 지역을 차지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1276년 중앙아시아에서 하이두와 대치하던 원나라 군대에서 몽케의 아들 시리기가 반란을 일으켜 하이두의 세력 확대를 허용시켰다.
 
쿠빌라이 칸의 행차도그런데도 쿠빌라이는 3번째 일본원정을 계획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원정을 추진하였으나, 1287년 즉위 때 지지모체였던 동쪽 3왕가가 나얀을 지도자로 삼아 반기를 들었으며, 중국 내에서도 반란이 빈발했기 때문에 만년의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을 포기했다. 또한 1292년 참파원정을 시도하였으나,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참파 공략을 비롯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원정은 상업루트의 개척에 뜻을 둔 경우가 강해, 최종적으로는 해상루트의 안전이 확보되는 성과를 올렸다.
 
생애 후반
 
계속 된 정벌과 정복 사업의 강행으로 젊은 장정들이 사라져 노동력이 황폐해졌고, 군비 조달로 인한 재정난의 증대는 재정의 악화를 가져왔다. 이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상인들의 교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는데, 이슬람교도 출신 서역 상인들과 위구르인 상단 등 주로 색목인(色目人) 계통의 상인들의 중국 진출을 허용함과 동시에 이들 색목인 출신 신흥 관료를 발탁하여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리크 부케와 그의 사주를 받은 두아 등 한국의 리더들의 반발과 반란에 봉착하는 가운데 79세를 일기로 대도에서 병사한다. 합리주의자이기도 했던 그는 중국의 사상에 매료되었는데, 주로 유교 사상 보다는 상앙과 이사의 법가 사상에 더욱 관심을 가졌으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용인술에 뛰어났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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