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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 이승만(李承晩, 리승만, 1875년 4월 18일 (음력 3월 26일) ~ 1965년 7월 19일, 황해도 평산 출생)
대한제국의 교육가·언론인·종교인·정치인이며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이다.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이자 대한민국의 국회의장이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대통령, 주석이었다. 처음 이름은 승룡(承龍), 다른 이름은 일수(一秀), 호는 우남(雩南), 본관은 전주이다. 황해남도 평산군 출신이다.
대한제국 시대에는 협성회 회보와 독립신문 주필, 교육계몽운동 등으로는 독립협회 활동 등을 하였고 대한제국 말기 밀사로 도미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이후 하와이에서 한인학원과 한인학교 등을 운영하였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 방법을 놓고 의견이 갈라섰을 때 그는 국내의 사정을 외국에 알리고 양해를 구하는 외교독립론을 주장하였다.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었으나 국제 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 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핵·파면되었다.[1]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총리, 한성 임시정부와 각지에서 수립된 임시정부의 수반을 거쳐 1919년 9월부터 1925년 3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회 외교위원 등을 역임했다. 주로 미국에서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벌였다.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2] 이후 1933년 11월에 다시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임되고 1934년 4월 2일에는 임정 외교위원에 선임되었다. 일제 강점기 중반에는 스위스 등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한편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으며 태평양 전쟁 이후 미군 OSS와 임시정부 간의 연결을 주선하였다. 일제 강점기 말기에는 미국 체신청에서 발행한 태극기 모양 우표 발행에 크게 기여했으며,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 연설 등에도 참여하였다. 1945년 해방 후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추대되었으나, 귀국 후 거절하였다.
1945년 12월부터는 김구·조소앙·김성수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으며 정부수립 방법으로는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지지,추진하였다. 대한민국 초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장, 대한민국의 초대·2·3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1952년의 사사오입 개헌 으로 1960년 4대 정·부통령 선거에 연임하였다. 그러나 3.15 부정선거를 계기로 일어난 4·19 혁명 직후 부정선거의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 하야하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였다.
대통령이 되기 이전의 생애집]초기 생애와 교육활동 출생과 가계 (1875 ~ 1877)
이승만은 1875년 3월 26일 황해도 평산군 마산면 대경리 능내동(陵內洞)에서 조선의 왕족이라고 주장하는 몰락한 양반 가문인 이경선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3] 초명은 승룡(承龍), 호는 우남(雩南)이다.
아버지 이경선(李敬善, 1839년 ~ 1912년),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1833년 ~ 1896년) 사이에 3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하였으나, 손위의 두 형이 그의 출생 전에 사망했기 때문에 장남 역할을 대신하였고 사실상의 6대 독자가 되었다. 아버지 이경선은 이승만에 의하면 "그는 부자였었으나 재산을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고 한다.[4] 이경선은 일찍이 벼슬길을 포기했고 이승만 위로 두 아들을 두었다가 천연두로 잃자 세상을 크게 비관했다.[5] 둘째 아들이 죽자 아버지 경선(敬善)은 격분한 나머지 역귀한테 올리는 터줏대감 상을 몽둥이로 부수고, 역귀가 머문다는 사당 앞에서 큰 칼을 휘둘렀다 한다.
그가 석달 동안 몸져 눕자 사람들은 그것이 그런 지각 없는 행동 때문이라 했다.
“ 내가 자손이 없이 죽으면 우리 집안의 긴 핏줄은 끊어지게 된다. 내가 나기 전 우리 집안에는 딸이 둘 있고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은 얼마 후에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에 후손이 없는 데다가 어머니는 자꾸 나이를 먹으시니 모두들 퍽 근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밤 어머니는 큰 용이 하늘에서 날아와 자신의 가슴에 뛰어드는꿈을 꾸고 깨어나서 가족에게 그 얘기를 하였는데, 그것이 나를 갖게 될 태몽이었다. 나는 그 얘기를 어머니한테서 여러번 되풀이하여 들었던 기억이 난다.[4] ”
— 이승만의 회고
그는 양녕대군(조선 태종의 장남)의 다섯째 서자 장평도정(長平都正) 이흔(李訢)의 15대손으로, 왕족이었지만 계승권에서 밀려나 가난하게 자랐기 때문에 이승만은 조선왕조 자체에 대해 극히 비판적이었다 한다.[6] 그는 장평도정의 장남 부림령(富林令) 이순(李順)의 후손이다.
왕족으로서의 대우는 장평도정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3대조인 수주정(樹州正) 이윤인(李允仁)에서 끝이 났고, 이윤인의 손자이자 이승만의 11대조 이원약(李元約)이 병자호란 때에 무공을 세워 전풍군(全豊君)에 추증되었고, 그 후광을 입은 몇몇 자손들이 무관직에 등용되기도 했으나, 이승만의 6대조 할아버지 이징하(李徵夏)가 음직(陰職)으로 현령(縣令)을 지낸 것을 끝으로 벼슬길이 끊기고 어렵게 살아갔다. 그럼에도 그가 조선의 왕실과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그가 왕정복고를 꿈꿨다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7]
이승만은 후일 자신의 간단한 일대기를 써서 로버트 T. 올리버에게 부쳤다. 그러면서 내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였다.
“ 나의 선조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4]나의 정적들은 내가 민주제도를 세우려고 하지 않고 왕권을 회복시키려 한다는 자기들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 나의 족보를 캐내려고 애를 많이 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적은 것은 윤곽에 불과합니다.[8] ”
— 로버트 T.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
그는 '아버지는 나에게 너는 6대 독자인 줄을 알라고 되풀이하곤 하였다. 그런 탓으로 주위에 가까운 친척이 없다. 구론대 먼알 16대 전의 나의 선조가 그렇게 관대하게 상속권을 그의 동생에게 넘겨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고종의 위치에 놓여졌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 나라느 고종 치하에서 독립을 빼앗긴 것이다. 그러므로 나와 이씨 왕족과의 먼 친척 관계는 나에게는 영예가 아니라 치욕이다. 그러한 관계로 나는 성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면 당장 바꾸어 버리기라도 하겠다.[9]'고 하였다.
유·소년기 (1877 ~ 1894)[편집]로버트 T. 올리버는 이승만의 전기를 쓸 때 '이승만의 가계는 다년간 그를 울분하게 만드는 원인이었고 또 그의 핸디캡이기도 하였다'고 한다.[8] 이승만은 자신이 왕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껄끄럽게 여겼다. 아버지 이경선은 계보학자이자 당대의 양반 사대부들처럼 여러번 자신의 족보를 아들에게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고, 나중에 양녕대군이 태조의 아들인지 태종의 아들인지도 구별 못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은 자신의 간략한 일대기를 적어 보낼 때 양녕대군을 태조의 아들[10]이고 정종에게 양보한 것 이라고 하기도 했다.
이승만의 증조부 이황(李璜)의 대에 한성부에서 황해도로 이주했다가 다시 아버지 이경선의 대에 다시 한성으로 이주하여 그 역시 부모를 따라 이동했다. 1877년 그의 가족은 황해도에서 한성으로 이사하여 숭례문 밖 염동, 낙동을 거쳐 도동의 우수현(雩守峴)으로 이사 다녔고, 우수현에서 성장하였다.[6] 그의 회고에 의하면 '아버지는 한때 부자였지만 젊은 시절에 모두 탕진해 버렸다. 어머니 말로는 내가 태어날 무렵에는 집에 재산이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부모는 어렵게 얻은 아들에 대한 공부열이 대단하였다. 1879년 퇴직 대신(大臣) 이건하가 운영하는 낙동서당에 입학하였고, 1885년부터 1894년 이전까지 사간원 대사간을 지냈으며 양녕대군의 봉사손 이근수가 운영하는 도동서당에 다니면서 수학하였다.[6] 도동서당은 한성부 용산에 있었다. 1887년 13세 때에 아명인 승룡에서 승만(承晩)으로 이름을 고쳤다.
아버지 이경선은 풍수지리에 몰두하여 조상의 묘자리를 새로 찾아 이장함으로써 가문의 재흥을 꾀한다는 생각에 남은 재산을 거의 탕진하고 방랑으로 집에서 일없이 지냈다.[5] 어려서 음죽 박씨 박춘겸(朴春兼)의 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아들 이봉수가 요절하면서 관계는 소원해졌고 결국 해방 후 최종 이혼한다.
유년시절의 이승만은 집중력이 뛰어났다. 그는 혼자서 몇 시간이고 연을 날리기도 하고, 나비 그림 그리기에 몰두하여 '이나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으며[11]:244 서당 정원에 꽃 심기에 몰두하여 '꽃귀신이 씌였다'는 반갑지 않은 말을 듣기도 하였다고 한다.[11]:244 한편 이승만은 유년 시절 주변에서 본 일상풍경이 미개하고 미신이 많았다고 회고하였다. 이승만에 의하면 자신이 태어날 당시 사람들은 상당히 미개하고 문을 꽉 닫고 살았다고 했다. '나는 당시 어른들이 중국사람들과 일본사람들을 무슨 뿔달린 괴상한 짐승들인 것처럼 얘기하는 것을 기억한다.[12]'고 했다.
청년기[편집]배재학당 재학 (1895 ~ 1897)[편집]1895년 4월 2일에는 아펜젤러의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6] 배재학당에 들어간 이승만은 초기에는 '기독교라는 사교집단의 선교사가 운영하는 학교' 에 대해 거부감과 두려움을 가졌다. [11]:295 그러다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곧 일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한국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1895년 11월 29일 명성황후가 살해당하자 이에 대한 원수를 갚는다는 계획(춘생문 사건)을 세웠다가 계획이 사전에 탄로나 황해도 평산의 누이 집에 3개월간 피신하였다.[6] 그 뒤 배재학당에 다시 복귀하였다.
서재필
(이승만에게 사상적 영향을 주었고,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했다.)
이상재
(이상재는 이승만의 정치적, 재정적 후견인이 되었다.)
윤치호1896년 귀국한 서재필의 강의를 듣고 서양사람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11]:295 그 후 이승만은 독립협회의 민중운동시기 즉 1898년 만민공동회 당시 가장 치열하게 앞장선 운동가들 중의 으뜸가는 청년이었으며 활발한 연설가로 활동하였다. 이때 그는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등을 만나 자주 교류했는데, 그 중 서재필은 그에게 미국 유학을 적극 권고하였다.
1896년 11월 30일 배재학당에서 양홍묵 등과 함께 청년단체인 협성회를 조직하고 미국식 토론회를 통해 개화-구국운동의 방향을 찾기도 하였다. 협성회에서 이후 이승만은 서기, 회장 등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6] 협성회는 나날이 발전했다. 동시에 이승만이 왕정을 타도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협성회의 창립회원이자 동지의 한사람인 이승구는 이완용의 아들이었다. 이승구의 아버지 이완용은, '자식이 이승만 패거리와 뭉쳐 다니는 것을 걱정'하여 미국 캘리포니아의 무관학교로 유학을 보내[13] 버렸다. 협성회는 계속 발전하였고, 학업과 협성회 활동을 병행면서도 이승만은 1897년 7월 배재학당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1897년 7월 8일 정동에 새로 지은 감리교회 예배당에서 배재학당 졸업식이 있었고 600명의 청중이 모였다. 1부는 문학 시강으로 한문과 영어의 공개 강독이 시행되었다.[14] 영어 강독에서 신흥우가 영어 문장을 읽고 한글로 유창하게 번역하자 청중들이 크게 호응했다. 이어 이승만이 영어 연설이 시작되었는데, 발음도 유창하거니와 조선의 독립을 역설하는 패기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14] :91
언론·계몽운동 (1897 ~ 1904)[편집]언론 활동[편집]1898년 1월 양홍묵과 함께 한글판 주간신문이자 협성회의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간하고 주필을 맡았다. 이때 이승만은 한국 최초의 현대시 '고목가(枯木歌)'를 신문에 싣기도 했다. 3월 10일 러시아의 이권 침탈을 규탄하기 위해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종로에서 제1차 만민공동회 집회를 개최하자 이승만은 연사로 참가, 가두연설을 통해 인기를 얻고, 대한제국 정부 외부대신에게 항의의사를 전달하는 총대(總代)위원으로 선발되었다.[6]
4월 한국 최초의 일간지인《매일신문》을 창간하고 사장 겸 저술인의 직책을 맡았다. 8월 10일에는 이종일과 함께 한글 신문인 《제국신문》을 창간, 편집담당과 논설담당을 겸하였다.[6] 11월 5일 익명의 투서 사건이 발생,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정을 도입하려했다는 혐의를 받고 독립협회의 이상재, 남궁억 등 간부급 17인이 체포되자, 이승만은 배재학당의 학생과 대중을 동원, 이들을 이끌고 경무청과 평리원(고등법원) 앞에서 철야 농성을 벌여 독립협회 간부들을 석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6] 11월 26일 고종 황제는 독립협회를 달래기 위해 헌의 6조의 실시를 약속하고, 남궁억 등 50여명을 중추원 의관(議官, 종9품)으로 임명할 때 함께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었다.[6] 이후 영의정에 임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12월 23일 고종이 만민공동회 해체로 방향을 바꾸자, 그는 미국인 의사 해리 셔먼의 집으로 피신하였다.[6] 이후 그는 협회의 전단지를 베포하다가 전단지 내용 중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 주셔야 한다.'라고 쓰인 문구가 문제가 되어 요시찰 대상이 되던 중, 1899년 1월 9일 발생한 박영효 일파의 대한제국 고종 폐위 음모에 가담하였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904년 8월 9일 석방될 때까지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투옥과 탈옥 미수[편집]1899년 1월 17일 주미국공사로 근무했던 알렌은 외부대신 박제순에게 이승만의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1월 30일 독립협회의 동지였던 한글학자 주시경을 만나 그로부터 몰래 건네받은 육혈포를 쏘며 동지 2인과 함께 감옥을 탈출했으나, 서상대만 중국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였고, 이승만은 중간에 붙잡혀 들어왔다.[6] 7월 11일 평리원 재판소에 회부, 당시 재판장으로 지냈던 홍종우에게 곤장 100대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한성감옥서에 재수감되었다. 이때 탈옥 동지였던 최정식은 처형당하였다.[6] 본래 성격이 성급하기로 유명했던 이승만은 오랜 감옥생활로 성격이 더 굳어지는 계기가 되었다.[11]:247 그는 옥중 생활에서 성경책을 통해 영어공부를 틈틈이 했으며, 이때부터 이승만은 영어공부에 재미를 느끼면서 심심풀이로 혼자서 한영사전 등 정리하기도 했었다. 그는 한성감옥 생활하면서 동료 죄수들은 물론, 간수들한테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한글과 영어를 가르치면서 많은 개화인사들을 길러내기도 하였다. 그리고, 옥중 생활 중 그는 민중계몽의식 가치관을 나타내는 저서 '독립정신'을 1904년 6월에 저술했다.[15] 한편 이승만은 옥중에서 어른 죄수와 어린이 죄수를 나뉘어서 글을 가르치고, 기독교 포교 활동을 했다.
독립정신은 총 52편으로 이뤄졌고, 크게 근대 역사관과 정치관으로 이뤄진 앞부분과 당시 시대상황을 해석한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시 독립정신은 대중과 지식인들에게 큰 인기가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출간이 되지는 않아 필사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돌려봤다고 한다. 이후 이승만이 도미한 1910년이 되어서야 LA에서 첫 출판본이 나올 수 있었다.
이승만은 이 책에서 입헌군주제의 도입을 주장했지만 실제로 해외 사례를 언급하는 부분 상당수가 미국의 독립선언문과 대통령제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차 있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이 실제로 원한 제도는 대통령제였지만, 집필 당시 사형수였다는 신분상의 이유로 입헌군주제를 옹호하는 척 하는 게 아닌가 하는 해석이 있다. [16]
고문과 후유증[편집]이승만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되어 고문을 당하였다. 한때 강원룡은 이승만의 고문이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 대통령은 일경에게 잡힌 적이 없으면서도 자기의 손을 보여주며 '왜놈에게 붙잡혀 고문당한 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17]'는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허정은 그가 독립협회, 만민공동회 사건으로 투옥당한 뒤 고문당한 것을 진술하였다.
허정은 자신이 황성기독교회관 청년부[18] 시절에 이승만이 안면 경련을 일으켰던 것을 진술했다. 허정은 '이 무렵의 이 박사의 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 때에도 이박사는 얼굴을 실룩거렸다. 그를 상징하다시피하는 이 안면 경련은 독립협회(獨立協會)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을 당해서 그리 되었다 한다.[19]'고 한다.
옥중 계몽운동과 석방
민영환
(그는 이승만을 석방하여 미국에 밀사로 보냈다.)
한성감옥에서의 이승만.(맨 왼쪽)[주해 1]옥중에서 영한사전을 집필했고, 1900년 8월, 한성감옥에서 청·일전쟁의 교훈을 다룬 중국 서적 《중동전기본말》을 한글로 번역하였다. 이는 뒤에 다시 1917년에 미국 하와이에서 《청일전기》라는 이름으로 재출간되기도 했다.[6]
1904년 7월 8일 이승만은 특별 사면령을 받고 석방되었다. 민영환, 한규설 등이 그의 사면을 위해 노력한 결과, 러일 전쟁이 발생하면서 그는 8월 9일 특사로 감옥을 나올수 있었다.[6] 민영환과 한규설을 만난 뒤 1904년 10월 15일 남대문의 상동교회 상동청년학원 교장직에 취임했으나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곧 사임하였다. 이때 그는 고종 황제를 만나보라는 민영환의 요청을 거절했고, 고종이 보낸 궁녀 역시 만나주지 않았다.
1904년 11월 4일에는 독립보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 민영환의 의뢰로 고종의 밀사 자격으로 일본 고베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 갔다. 그 해 12월 31일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시카고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하였다.
외교 활동 (1904 ~ 1905)
1905년 8월.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만나기 위해 예복을 갖춘 이승만 박사.1904년 8월 민영환, 한규설 등의 건의로, 예정이 없던 특사조치로 출옥한 이승만은 민영환(閔泳煥)을 만나 그의 밀서를 소지하고 미국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11월 도미한다.[20]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여 밀지(密紙)를 써서 궁녀를 비밀리에 그에게 보냈다.[11]:247 그러나 왜 고종이 그를 만나기를 원하는가를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밀지를 들고 온 궁녀를 돌려보냈다. 이승만은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이라며 나라를 망쳐버린 고종과는 아예 상종도 하지 않겠다며 거절하였다.[11]:247
1905년 1월 15일 미국 신문 "워싱턴 포스트" 지와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의 한국 침략을 폭로하는 인터뷰를 하였다.[6] 2월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교에 2학년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6] 2월 20일 이승만은 한국에 선교사로 왔던 적이 있던 미국 상원의원 휴 딘스모어를 찾아가, 그의 주선으로 존 헤이 미국 국무장관과 30분간 면담하였다. 헤이 장관을 설득,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한국의 독립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으나, 헤이 장관의 죽음으로 허사가 되었다.[6] 4월 23일 워싱턴 D.C의 커베넌트 장로교회의 류이스 햄린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6]
1905년 8월 윌리엄 태프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와 미 의원 워즈워스를 대동하고 아시아 수행길에 하와이의 호놀룰루를 경유하였다. 이때 이승만은 호놀룰루의 한인 선교부를 책임지던 와드먼 박사를 통해 태프트와 접촉, 그의 추천장을 받아 시어도어 루스벨트를 만났다.[11]:297 어렵게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을 만나기는 했지만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20] 9월 10일 대한제국 황실 시종무관장 민영환으로부터 격려 편지와 함께 300달러의 경비를 지원받았다. 그러나 두 달 후에 민영환은 을사조약에 대한 울분을 못 이겨 자결함으로써 순국한다.[6]
1905년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대한제국을 방문, 고종 황제를 예방하게 되는데 한국은 미국이 한국의 독립에 우호적인 입장으로 판단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으나 앨리스 루스벨트는 융숭한 대접만 받고 되돌아갔다.[21] 테오도어 루즈벨트는 끝내 이승만을 만나주지 않았다. 이미 태프트를 보내 일본총리 가쓰라와 밀약, 뒤에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진실을 알게 된 이승만은 미국이 한국을 일본에게 팔아넘겼다고 확신하였고 그 후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11]:297 밀사활동 실패에 실망한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다.
도미 유학 (1906 ~ 1910)
모교 조지 워싱턴 대학교
1909년의 이승만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대학원생 기숙사의 탑을 그린 유화. 이승만 전 대통령도 이 기숙사에서 묵었다고 전해진다.이후 이승만은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철학(哲學)을 공부하였다. 1907년에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학사 학위(Bachelor of Arts)를 받고, 하버드 대학교에서 철학 석사(M.A) 학위를, 그리고 1910년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22] 라는 논문으로 철학 박사 학위(Doctor of Philosophy)를 받았다. 학비나 후원자가 없던 이승만은 노동과 아르바이트로 학비를 조달하였다. 그의 처지를 알게 된 지도교수가 학교에 요청하여 장학금과 박사학위 출간 비용을 지원받기도 하였다.(박사 논문 제본 비용 80달러가 없어서 논문은 2년 후인 1912년에 출간된다.) 1908년 덴버의 감리교회에서 열린 애국동지회에 참석하였다.
그 뒤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1908년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으로 활동하던 친일파 미국인 더럼 스티븐슨을 오클랜드기차역에서 저격, 암살하여 미국 법정에 서게 되었다. 미주의 한인들은 전명운, 장인환의거에 변호하기 위해 십시일반하여 이들의 재판을 도왔는데, 그 와중의 법정 통역을 이승만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예수교인으로 살인자들의 통역을 원치 않는다'며 법정 통역을 거절했다.[23] 당시 이승만은 이 사건에 대해 미국인들의 여론반응을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통역을 거부했던것이다.
두명의 한국인이 루스벨트대통령의 친구인 스티븐스를 사살하였다. 이 살해사건은 일본의 선전기관들이 한국사람들은 흉도이며, 최악의 악당이라고 묘사하는데 대대적으로 이용되었다.
-이승만 자서전 초고문서 내용中.-
이듬해 1909년, 안중근의사가 이등박문을 저격하였을때도 이승만의 반응은 미국여론을 살펴보면서 미국 여론의 악화를 걱정했었다.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정치가 이토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이렇게되자, 미국 각종 언론 신문에는 '한국인들은 잔인한 살인마이며 무지몽매하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자주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한국인인 나와 이야기하는것을 두려워했었고, 교수들은 나를 무서워해서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 자서전 초고문서 내용中.-
이승만은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영향으로 그의 이름을 성보다 앞서 사용하는 서양식 이름을 썼다 (Syng-Man Rhee, 또는 승만 리). 당시 박사(博士)가 거의 없었던 한국에서 이승만은 '박사'의 대명사가 되었고, 1948년 8월 대통령이 된 뒤에도 사람들은 그를 이승만 대통령보다는 '이승만 박사'라고 불렀다. 1908년 8월 미국 콜로라도 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상설과 함께 연해주(沿海州)대표로 회의에 참석하였다.[24]
귀국과 재망명 귀국과 선교 활동 (1910 ~ 1913)[편집]
1910년의 이승만1910년 3월 국민회에 가입했다. 1910년 한국으로 돌아가 YMCA에서 교사로서, 그리고 이어 YMCA 청년부 간사로 취임하여 기독교를 선교하였는데[11]:248 감리교파 선교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또한 당시 들어온 신문화에 대해 긍정적이라서 "나라가 없어진 것은 슬프지만 왕, 양반, 상투가 없어진 것은 시원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1912년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1912년 4월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에서 열린 국제감리교 회의에 참석하였다.[25] 1913년 그는 귀국을 시도했으나 아버지 이경선으로부터 귀국하지 말고 미국에 체류하라는 편지 서신을 받고 귀국을 단념한다.
1913년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이승만은 옥중 동지인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건너갔다. 1913년 2월 3일 이승만은 박용만과 함께 하와이에 정착했다. 이승만과 박용만은 한성감옥에서 만나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둘 다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었다.[26] 이승만은 105인 사건을 폭로하는 《한국교회 핍박》을 출간하였고 그해 8월 미국 하와이 감리교회가 운영하는 한인학교인 '한인기숙학교'의 교장직에 추천되어 취임하였다. 이어 한인기독학원(KIC)의 원장도 겸하였다. 이때 그는 한국어와 한문을 새로 가르치고, 뒤에 학교 이름도 '한인기독학원'에서 '한인중앙학원'(韓人中央學院)으로 재단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6]
하와이 정착과 국민회 분열 (1914~1918)
1915년 대한인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오른쪽 열한번째는 이승만, 가운데 단상에 선 이는 안창호)이승만은 하와이에서 감리교 부속의 한인중앙학원장으로 재직하면서 교육 활동과 실력운동 양성에 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감리교에서 설립한 한인기숙학교를 '한인중앙학원'이라 고치고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그러나 미국인 감리교 감리사가 이승만의 민족교육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에 이승만은 반발하고 학원장직을 사임, 새로운 학원을 세웠다. 그는 태극기를 걸어놓고 민족교육에 열중했다. 이승만은 한인기독교회를 창설하고 교회 안에서 어린이들에게 한국어를 교육하기도 했다.[27]
그리고 '태평양 잡지'를 창간해 '청일전기' 등의 홍보물을 간행하는 등 언론 출판활동을 전개했다. 이들 학생과 후원자들은 뒷날 이승만 계열 또는 후원자가 되어 하나의 파벌을 이루었고, 뒷날 대한인 동지회로 발전하게 된다.[27] 독립운동을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이승만은 하와이섬의 마운틴 뷰에서 숯 사업을 시작하기도 있다. [28]
한편, 이무렵 1914년 박용만은 국민군단을 창설했고 군사력을 양성코자 했으나 이승만은 무장투쟁에 반기를 들었고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을 중시했으므로 두 사람은 대립하게 되었다. 이승만은 1915년 6월 17일 스타불레틴 신문에 기고하여 자신은 어떠한 반일적인 내용도 가르치지 않으며 보편적인 인류애를 가르치고자 한다고 했다. 그는 지역 일본인 신문들이 자신이 반일감정을 조장한다는 오해를 하지 말았으면 한다고 말했다.[29]
1913년 4월. 하와이 호놀룰루 기차역에서 나란히 포즈를 취한 이승만(왼쪽)과 박용만. 한때 결의형제를 할 만큼 일생의 동지였던 두 사람은 독립운동 방법론과 국민회기금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결국 정적이 되고 말았다.[주해 2]하와이 한인들은 국민회에 의무금을 납부하였고 국민회는 당시 최대 인력과 자금력을 가진 독립운동 단체였다. 이승만은 국민회 회장 선출과 자금 사용 내역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고 국민회측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열과 대립은 오래 지속되었고 테러, 폭동이 일어났다.하와이 법원에는 이승만과 관련된 소송이 10여건 벌어졌다. 당시 로베르타 장이 수집한 재미한인 교포들의 인터뷰는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과반수 이상은 이승만이 한인사회에서 위험한 인물이라고 기억했으며 이승만의 조직원에 의한 암살 시도 증언도 있다.[26]
감리교교단과 수시로 마찰을 빚어오던 중 1915년 6월에는 자신이 운영하던 '한인중앙학원'을 미국 감리교 선교부 통제하로부터 독립시켰다.
감리교단, 박용만과의 갈등[편집]1917년 이승만은 하와이 주 호놀룰루에서 과거 옥중에서 쓴 저서 '독립졍신'(제2판)과 '청일전기'를 출판하였다. 그해 10월 29일 뉴욕에서 개최된 25개 약소 민족대표자 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하였다.[6]
1918년 7월 29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수립된 '신립교회' 예배당 헌당에 참여하였고, 9월 '한인여자성경학원' 을 남녀공학의 한인기독학원(The Korean Christian Institute) 으로 바꾸었다. 12월 1일 정한경, 민찬호 등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의 파리 평화회의 한인대표로 선출되었다.[6] 12월 23일 '신립교회'의 이름을 한인기독교회(The Korean Christian Church)로 바꾸었다. 이승만은 교회를 분열시켰으며 헤이즐 정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한인들은 이승만의 교회 아니면 감리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26]
1918년 박용만은 일본군 선박 출운호를 폭파하려 한다는 혐의를 받고 하와이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신한민보에 따르면 당시 이승만이 증인으로 출석하여 국민군단을 비난하였다고 한다. 이 사건 이후 국민군단은 해체되고 박용만은 하와이를 떠났다. 이승만이 국민회를 장악하자 대립은 일단락되었다. 이승만은 반대자가 많았지만 지지자들에게서는 숭배에 가까운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26]
1918년 11월 독일이 일단 항복함으로써 세계 제1차 대전이 끝나고 다음해 1월 18일 파리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다.[30] 서재필 역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평화회의에 이승만 박사, 민찬호 목사, 정한경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들은 미국 시민이 아니므로 여권을 얻을 수 없었다. 이들은 일본 국민인 까닭에 마땅히 일본대사관에서 여권을 받아야 한다는 게 국무부의 해명이었다.[30]
독립 운동과 임시 정부 활동
1919년 4월 16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던 '한인자유대회'.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정한경, 여섯 번째가 서재필, 일곱 번째가 이승만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을 위한 파리 강화회의가 예정되고, 미국 대통령인 우드로우 윌슨은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그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에 밀지를 보낸다.
1918년 12월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와 김성수를 찾아갔다.[31] 이승만이 보냈다는 그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31]"는 내용의 밀서를 전해주었다.[31]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나름대로 뜻이 있었던 송진우는 일단 밀서를 반송, 되돌려보냈다.
1919년 2월 1일 발표된 무오 독립선언 선언문에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2월 중순 일본인이 보낸 밀정의 저격을 받았으나 미수에 그쳤다. 국내에는 그가 일본인에게 저격당한 사실이 바로 알려졌다.[32]
3월 1일 미국 현지에서 3·1 만세 운동의 소식을 접하였다. 그는 3.1 운동으로 조선인의 독립의지가 세계에 홍보될 것으로 예상했다. 3·1만세 운동 이후, 3월 21일 러시아령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노령 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에 선출되었고 이승만은 그 사실을 4월 5일에 미국 워싱턴에서 통보받았다. 1919년 4월 1일 기호지방에서 설립되려다가 해산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도 국무총리에 추대되었다. 4월 7일 이승만은 노령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외무총장 자격으로 UP통신과 기자회견을 하였다.[6] 1919년 4월에는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총리(혹은 집정관 총재)로 뽑혔다.
4월 14일 3·1 만세 운동의 열기가 미국에 번져 한인자유대회가 미국 독립기념관이 있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렸다. 이승만은 이 대회에서 한국이 독립하면 기독교 국가 건설과 미국식 민주제를 시행하겠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미국 최초의 의회 장소로 발길을 옮겨 미국 초대 대통령 워싱턴이 앉았던 의자에 앉았고 사진이 남아 있다.[29] 3·1 운동 소식을 접한 서재필은 만세운동에 호응하기 위해 4월 초에 공지하여 4월 13일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연합회의(The First Korean Congress)를 소집하였다. 이승만은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다. 3일간의 제1차 한인연합회의가 끝난 뒤, 바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세계에 선언하고자 4월 16일에는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 그는 연사로 참여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도자 (1919 ~1925)
1921년 상하이에 도착한 이승만대통령 환영식
(가운데가 대통령 이승만, 오른쪽은 안창호, 왼쪽은 이동휘)1919년 4월 15일 길림성에서 선포된 고려임시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추대되었고, 4월 17일 평안북도에서 설립된 신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국방총리로 추대되었다. 4월 19일 인천에서 수립된 조선민국임시정부 로부터는 집정관총재 겸 국무총리에 선임되었다. 1919년 4월 23일에는 경성에서 한성임시정부가 이승만을 집정관 총재로 추대했다. 그러자, 이 즈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워싱턴 D.C.에 집정관 총재 사무실을 열어 재빠르게 대외적으로 대통령 행세를 했다는 의견이 있다.[33] 각지의 임시정부의 총리, 수반으로 추대되자 1919년 4월 이승만의 목에 일본 제국 정부의 명의로 30만 달러의 현상금이 걸렸다.
6월 14일부터 6월 27일 그는 '대한공화국' 대통령 이름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국가원수들과 파리 평화회의 의장 조르쥬 클레망소에게 한국의 독립선포를 알리는 공문을 발송했다. 7월 4일 국ㆍ내외 동포에게 독립을 위한 헌신을 촉구하는 '대통령 선언서'를 발표했다. 7월 17일 워싱턴 디시에 '대한공화국' 임시공사관을 설치했다.
1921년 1월 1일 신년하례회. 두번째 줄 오른쪽에서 일곱 번째가 이승만8월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사무소를 한국 위원회로 개칭했다. 8월 15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대한독립혈젼기(大韓獨立血戰記)를 발간했고, 8월 16일 대한인국민회가 연 이승만의 집정관 총재 추대 축하식에 참석하였다. 그러나 그의 '프레지던트'(President) 칭호 사용이 상하이에 알려지면서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논란이 발생하였고, 논쟁이 격화되자 8월 25일 임시정부의 내무부 총장 안창호(安昌浩)는 그에게 전보를 발송한다.
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 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이하 생략)...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세를 하시면 이는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사를 하지 마시오.
- 1919년 8월 25일 안창호의 서신 -
이승만은 안창호에게 다음과 같은 답장을 보낸다.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 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언급하지 마시오.
- 1919년 8월 26일 이승만의 답신-
1920년 3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한 임정 구미위원부 간부들
(앞줄 가운데가 이승만 박사, 그 오른쪽이 김규식 박사)1919년 9월 1일에는 김규식과 함께 '독립공채표' 혹은 '대한민국 공채표'를 발행하기도 하였다. 공채표로 거둔 의연금은 상하이에 소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되었다. 원래 이 애국공채는 한국의 건국시에 공채 형식으로 상환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승만은 임시정부는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단체라고 하면서 상환을 거부했다고 한다. 1919년 9월 11일에는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연해주의 대한인 국민회, 서울의 한성정부 등이 합쳐저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이동휘로 하는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대통령에 선출된 이후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이승만에게 상하이로 와줄 것을 청원하는 청원서를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명의로 워싱턴에 발송하였다.
8월 이승만은 한국위원회를 필라델피아에서 서재필이 임시정부 공식대표로 운영하고 있던 한국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하여 구미위원부로 개편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실망을 느끼고 미국으로 건너온 김규식을 맞이하여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삼았다. 이승만은 김규식에게 하와이 및 멕시코 등지의 한국인 교포들로부터 공채금과 의연금을 징수하는 역할을 부여하였다.[34] 이후 김규식은 1920년 10월 미국을 떠나 상하이로 향했다.[35] 또한, 이승만은 1919년 10월부터 1920년 6월 이승만은 미국 각지를 순회하며 '대한공화국'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하는 강연, 홍보활동을 하고 다녔다. 한편 이승만은 일본 천황 히로히토와 조선총독부 앞으로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이는 묵살당하였고 다른 독립운동가들로부터도 조롱당하였다.
1922년 임시정부 제3기 정부 구성에서 이승만은 대통령에 유임되었다.[36] 1924년 11월 23일 대한인동지회에서 종신총재로 추대하였다.[37]
임시 정부 각료들과의 갈등[편집]대통령에 뽑혔지만 이승만은 여전히 미국 하와이와 워싱턴 등지에서만 거주하고 있어, 상하이에 있는 임정에서는 이승만의 정부 내도를 촉구하는 서한을 여러 차례 보냈다. 1920년 12월에 처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로 배를 타고 임병직, 이원순 등을 대동하고 미국에서 상하이로 건너왔다. 배삯이 부족하여 중국인 시신 운반선에 밀항하여 고국으로 운반되는 중국인의 시신들 틈에 숨었다가 상하이로 건너오게 되었다.[출처 필요] 상하이로 건너온 그는 자신의 목에 걸린 현상금 30만 달러라는 수배전단지를 발견, 한자를 잘 구사하는 점을 이용, 중국인 복장을 구한 뒤 중국인으로 행세하며 임시정부에 나타났다. 1921년 5월 미국의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가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던 데는 당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이승만이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총장이었다는 점이 작용하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외교 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이루고자 했고, 외교활동의 주된 목표는 민족자결주의를 선포한 미국이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임명되기 전에 당시 임시정부 직제에 없었던 대통령 명함을 사용함으로써 안창호와 대립하였으나, 9월 임시정부 체제를 대통령제로 개정하면서 겨우 봉합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에도 데모크라시를 주장하여 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이동휘·여운형·한형권 등과 대립하였다. 1921년 이후에는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 체류하지 않았다.
임시 정부 대통령 탄핵 (1925)[편집]1921년 이승만은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건을 계기로, 임정 내 일부 독립운동가들과 내부 대립,갈등하게 되었다. 신채호는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다"고 말했고 임시 국무총리 이동휘는 "대통령이 위임통치를 건의하는 바람에 정부 대표로 가 있는 김규식 특사가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위임통치를 요청하려면 뭐 하러 파리까지 왔느냐는 것이지요. 그러니 불필요한 오해를 낳는 위임통치 청원을 철회한다는 성명서를 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라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대통령을 비난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다. 위임통치 건은 지나간 일이니 철회할 의사가 없다.'고 답했다.[38]
1925년 3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의 탄핵 의결로 대통령직에서 면직되었다.[37] 다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탄핵서 전문이다.
주문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면직시킴. 이승만 탄핵안에 의해 그 위법사실을 조사한 증거를 열거하면 민국 6년 12월 22일부로 전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보낸 공문, 동 6년 12월 22일부로 국무원 각위 회람으로서 송부된 임시대통령 공문, 동 6년 7월 3일에 발한 구미위원부 통신부 특별통신, 동 7년 1월 28일에 낸 구미위원부 통신 특별호, 동 7년 2월 13일부로 박은식에게 송부한 서신 등과 같다.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지를 떠나 5년 동안 원양일우에 편재해서 난국수습과 대업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허무한 사실을 제조 간포해서 정부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민심을 분산시킨 것은 물론, 정부의 행정을 저해하고 국고수입을 방해하고 의정원의 신성을 모독하고 공결을 부인하고, 심함에 이르러서는 정부의 행정과 재부를 방해하고, 임시헌법에 의해 의정원의 선거에 의해 취임한 임시대통령으로서 자기의 지위에 불리한 결의라고 해서 의정원의 결의를 부인하고, '한성조직 계통 운운'과 같은 것은 대한민국의 임시헌법을 근본적으로 부인하는 행위다.
이와 같이 국정을 방해하고 국헌을 부인하는 자를 하루라도 국가원수의 직에 두는 것은 대업진행을 기하기 어렵다. 국법의 신성을 보지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순국 제현이 명복할 수 없는 바이고, 또 살아있는 충용들이 소망하는 바 아니므로 주문과 같이 심판한다.
대한민국 7년 3월 11일 임시대통령 이승만 심판위원회
위원장 나창헌
위원 곽헌, 채원개, 김현구, 최석순
[39]
한편, 임시정부의 외교부장직을 맡았던 조소앙은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의 이승만 대통령 탄핵,면직 조치에 극력 반대 입장을 표명했고, 이듬해 1926년 말까지 하와이에 거주했던 이승만에게 임정 내부의 사정을 내보(內報)하며 이승만의 복권을 시도했었다.[40]
구미외교위원부 활동 (1925~1930)[편집]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직에서 탄핵당한 이후, 이승만은 구미외교위원부에 활동하며 미국, 유럽, 국제연맹 등에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는 성명서를 보내는 등 각종 외교적 활동을 하였다. 1919년 8월 김규식, 여운홍, 장택상 등의 도래와 임정 파리위원부를 구미위원부로 흡수하여 구미위원부 산하 주불대표부로 활용하였고, 미국과 유럽을 상대로 임정 홍보와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에 지지를 보내줄 것을 호소하였다. 주불대표부를 통해서 이승만은 유럽의 정치정세 변동과 정보를 수시로 입수하였다.
구미외교위원부는 1919년 5월 이승만이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자격으로 설치한 집정관 총재 사무소와 서재필이 운영하고 있던 한국통신부와 주 파리 위원부를 흡수하여 개편하여 만든 것이다. 구미 위원부는 한국의 입장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기여를 했으나 태평양 회의(1921-22)에 한국 문제를 상정하지 못했고 임시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도 이루지 못하는 등 구체적인 외교상의 성과는 없었다. 게다가 출범 초부터 이승만의 개인기관으로 활용되어 대한인국민회가 임시정부에 보내는 애국금을 전용하는 문제를 일으켰다. 마침내 임시정부는 1925년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임정의 구미위원부 폐지령을 묵살하였으며 계속 구미위원부를 가동하였다. 일설에는 1928년 재정난으로 해체될 때까지 유지되었다[41]는 설이 있었으나 1926년 김현구라는 최측근을 기용하여 구미위원부의 살림살이를 맡기기도 했다.[42]
김현구는 1926년 이후 1929년까지 임정 구미위원부의 대소사를 총괄했는데, '1926년부터 1929년까지 3년간 워싱턴 구미위원부 위원으로서 위원부의 살림을 꾸려갔던 김현구는 1927년 1월부터 1928년 7월까지 1년 반 기간에 걸쳐 무려 131통의 간찰(편지)을 이승만에게 발송했고, 이승만으로부터 4통의 답변을 접수받았다.[42] 임정의 구미위원부 폐지령에 반발한 이승만은 임정으로 보내는 송금줄을 차단하고, 미국 교포들에게도 임정으로 송금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임정과의 갈등
1928년 11월 20일 김구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추운 겨울에 털옷 조차 입지 못하는 임시정부의 어려운 자금 사정을 호소하였다.)1929년 이후 이승만은 임정과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임정 구미위원부를 가동하며 외교, 구국활동을 하였다. 그의 구미외교위원부에는 한국인 유학생인 조병옥·허정·장택상 등이 나타나 업무를 보좌하였다. 1928년 4월 10일 이승만은 구미위원부에서 《재만동포옹호》팜플렛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37] 1929년부터 1930년 1월 8일 시사이 이승만은 미국 본토 전역을 방문하고 호놀룰루로 돌아 온 후 "태평양잡지"를 "태평양주보"로 이름을 바꾸어 다시 발간하기 시작했다.[37] 이승만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의 구미위원회 대표직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안창호, 박용만 등과 갈등이 계속되었다. 미국 내의 재미 교포 조직들은 안창호 지지 세력과 이승만 지지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이들의 분열은 미국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수 없었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일본 경찰의 감시와 침투를 피해 프랑스조계(프랑스 대사관 관할구역)와 영국조계, 중국 국민당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의 건물에 월세를 주고 입주했다. 그러나 청사 임대료 30원을 내지 못해 건물주, 토지주로부터 고발당하였고, 청사의 각부 직원과 잡일을 하는 급사, 경무국 직원들의 월급도 제때 주지 못하였다. 일부 급사들은 임정을 떠나거나 임정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고, 경무국에서 일하던 청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김구는 그에게 자금 지원을 호소하는 편지 서신을 여러번 보냈다.
1928년 박용만이 텐진에서 의열단 단원 박인식, 이해명 등에게 암살당하자 이승만은 서재필과 함께 미국내의 언론과 방송 담화를 통해 의열단을 비난하였다. 의열단의 경쟁세력인 임시정부의 김구가 나서서 이승만에게 박용만은 총독부에 매수된 밀정이라는 답신을 보냈으나 이승만은 그럴리 없다면서 비난 철회를 거부하였다.
1930년대에서 40년대 초[편집]외교 홍보 활동 (1930 ~ 1933)
1931년때 이승만.1920년대 후반 임시정부는 자금난에 시달렸고, 자금을 마련할수 없었던 김구는 고민하게 되었다. 김구는 재중 한인 동포들과 교민단체의 후원금과 성금 모금에 의존하는 한편 1928년 이후 미국에 있는 이승만에게도 자금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승만은 자신도 처지가 어렵다고 거절하면서도 자금의 일부를 임시정부에 꾸준히 송금하였다.]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해 의거를 일으켰을 때, 미국에 있던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윤봉길의 의거를 비판하였다.
“ 이런(의거) 행동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선동만 강화시켜줄 뿐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 못할 것이다.
-이승만 자서전 내용中[43]
”
뒷날, 1943년 카이로 회담이 열리자 이승만은 카이로 회담에서 '장개석으로 하여끔 한국의 독립을 제안하고 그 선언문에 병문화시킨 것의 원인은 윤봉길 의거에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44]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는 임정의 존재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국민대표자대회 이후 임정의 반이승만 세력이 사라지면서 이승만은 임시정부에 후원금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또한 한국인 교민들로부터 성금을 모금하여 상하이의 임정으로 송금해주었다.
1934년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이승만과 프란체스카 도너1932년 11월 10일, 이승만은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의해 국제연맹에 한국의 독립을 탄원할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45] 1932년 12월 미국을 출발하여 리버풀, 런던, 파리 등을 경유한 후 1933년 1월 26일 국제연맹 본부가 있는 제네바에 도착하였다.
1933년 국제연맹에 참가하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가서 대한독립청원서를 제출하였다.[11]:63 1933년 1월 26일 프랑스어 일간신문 《주르날 드 제네바》지와 인터뷰하였고,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45] 2월 8일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공한(公翰)을 국제연맹 회원국 대표들과 기자들에게 배포하였고, 2월 16일 국제연맹의 방송시설을 통해 극동분쟁과 한국에 관한 연설을 하였다.[45] 1933년 2월 21일 제네바의 호텔 드뤼시 식당에서 오스트리아인 프란체스카 도너(Francesca Donner)를 만났다.[45]
김규식과 함께 찍은 사진2월 22일 제네바의 프랑스어 신문《라 트리뷴 도리앙》지에 그의 독립운동 관련 기사가 보도되었고, 2월 23일 베른의 독일어 신문 《데어 분트》도 활동 상황이 실렸다.[45] 7월 9일 스위스 제네바를 출발하여 7월 20일 소비에트 연방으로 건너가 소련에 한국의 독립에 대한 도움을 호소하고자 모스크바 기차역에 도착하였으나(비엔나 경유) 즉시 쫓겨났다.[45] 8월 10일부터 8월 16일 프랑스 니스를 출발하여 미국 뉴욕 주에 도착했고, 그해 10월에 하와이 호놀룰루로 되돌아왔다.[45] 1934년 1월 12일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기사로 보도하였다.[45]
1933년 3월 6일의 제25회 임시 의정원 회의에서 무임소 국무위원에 보궐 당선되었다.[46] 이로서 임정에서 탄핵당한지 8년만에 다시 임시정부 각료로 복귀하였다.
임정 외교위원, 국무위원 선임 (1934 ~1939)[편집]1933년 11월 이승만은 이동녕 내각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다. 임정 일각의 반대에도 외교 활동을 위한 그의 역할이 크다는 이동녕, 김구 등의 주장에 의해서였다. 1934년 1월 12일 워싱턴의 《데일리뉴스》지가 이승만의 활동을 기사로 보도하였다.[45]
1934년 4월 2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행서규정을 공포하여 외무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위원을 선임할 때, 조소앙·최동오·이승만·신익희를 외교위원으로 선임하였다.[47] 1934년 7월 22일 미국 국무부의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와 면담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9월 16일 장기영과 함께 몬태나 주의 뷰트를 방문하였다. 이는 《몬태나 스탠다드》지가 기사로 게재하였다.[45] 1934년 9월 20일부터 10월 8일 사이 뉴욕 주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다. 1935 1월 24일 프란체스카 도너와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으며,「스타불리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칼럼을 실었다.[45] 9월 20일 뉴욕 랙싱턴 가(街)의 호텔 몽클래어에서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하였고, 10월 8일까지 신혼기간을 보냈다. 백인 여성과의 결혼을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신혼 초기부터 프란체스카 도너는 한인 지도자의 외국인 신부를 탐탁치 않게 여긴 한인 교포들에 의해 '호주댁'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호주댁[주해 3]이 뭐냐는 질문에 이승만은 좋은 이름이라고 대답했다.
1935년 1월 24일 배우자와 함께 하와이 호놀룰루 시에 도착, 《스타불리틴》지에 만주 한국인도 독일의 자르 지방인들처럼 민족자결의 원리에 따라 지위가 결정되어야 한다는 호소문을 발표하였다. 1937년 임시정부 외교위원에 선출되었다.
1938년 4월 24일 하와이 주 호놀룰루 시 릴리하 가(街)에 '한인기독교회' 건물을 낙성하였고[45], 1939년 3월 30일 제2차 세계 대전의 가능성이 보이자 워싱턴D.C에서 구미위원회 활동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 호놀룰루로 돌아왔다. 8월 30일 한국인과 중국인이 국제정세에 대해 몽매한 것을 한탄하며 한국의 독립에는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을 강조하는 편지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김구에게 발송하였다. 이어 12월 10일 《워싱턴포스트》지와 인터뷰에서 이청천 장군의 독립운동을 알렸고[45], 이는 《워싱턴포스트》의 기사로 보도되었다. 1939년 조선에 입국하여 경성부 YMCA 강당에서 강연을 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경찰을 파견하여 이승만을 체포하려 하였으나 그는 한국의 기독교 선교사들의 비호를 받았고, 선교사들에 의해 빼돌려져 체포를 면하고 부산항을 거쳐 다시 하와이로 되돌아왔다.
태평양 전쟁 전후 (1940 ~ 1942)
김구, 주석 취임 직후 그를 구미위원장으로 복직시킨다.
1941년 6월에 이승만이 출판한 《일본을 벗기다》(Japan Inside out). 이 책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실상을 낱낱히 비난하는 내용으로 향후 미국은 일본과 장차 전쟁을 하게 될 것임을 예견했다. 이 책 발간 6개월 후인 1941년 12월, 실제로 진주만 공격을 받은 미국에서는 커다란 관심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1940년 3월 김구가 주석으로 취임한 후, 6월 4일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다시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으로 승인받았다. 6월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과 태평양 제 국가를 식민지로 삼아 유럽, 미국 침략을 경고한 '일본을 벗기다'를 출간하였다.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전쟁을 겪은 미국인에게 일본의 침략을 사전 경고한 이승만의 '일본을 벗기다'는 이후 진주만 공격 이후 큰 설득을 얻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이 책은 대지의 저자 펄벅에게 "무서운 진실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들었다.[48]
그해 9월 광복군 창설 소식을 통보받고 축전을 보낸다. 그러나 김원봉 등의 입각을 추진한다는 소식에 그는 김원봉 등을 절대 참여시켜서는 안된다며 김구, 조소앙 등에게 항의 전보와 전화를 한다.
1941년 12월의 진주만 공격을 계기로 미국과 일본이 전쟁상태로 들어간 직후 이승만은 일본의 패배가 당연하다고 생각한 이승만은 한국이 독립국이 되어야 하므로 미국은 중경 임시정부를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299 12월 9일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시작하자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연락을 받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을 전달받은 뒤, 동 12월 9일 미국 국무부 정치고문 스탠리 혼벡 박사,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미국 국무부 장관 코델 헐 등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선전포고문과 임시정부 승인 요구 공한(公翰)을 전달하였다.
소련의 한국 점령을 우려하던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로 미국 국무부와 빈번히 접촉하였다. 1942년 1월 이승만은 미국 국무부에 소련이 장차 한반도를 점령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11]:99 1942년 1월 2일 미국 국무부의 실세인 알저 히스와 면담하였다. 1942년 1월 2일 이승만은 국무부를 방문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과 일본을 상대로 한 대일전쟁에 참가하기 위한 무기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미국 국무부의 혼벡과 히스는 현 시점에서 한국의 독립정부를 승인한다면 소련의 반감을 사게 될 것이고, 소련이 대일본 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을 할 수도 없지만 소련의 관심 또는 이권을 무시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승만의 임시정부 승인요청을 거절하였다.[11]:299 1월 16일 한국에 우호적인 미국인들과 함께 한미협회(The Korean-American Council)를 창설,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미국의회 상원 원목인 프레데릭 해리스(이사장), 전 캐나다 대사 제임스 크롬웰(회장), 언론인 제이 제롬 윌리엄스, 변호사 존 스태거즈 등을 중심인물로 선출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승인 운동 (1942 ~ 1944)
태평양 전쟁1942년 2월 27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자신의 신임장과 임시정부의 공한을 제출하였다.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 D.C의 라파옛 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 개최. 이승만이 이끄는 한미협의회와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공동 주최하였다. 행사 참석 후, 3월 23일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을 찾아가 임정을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그 뒤에도 계속 미국에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11]:299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측에서는 1882년 체결된 한미수호조약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 한국사람들의 대일본 전쟁에서의 공헌 가능성 등을 설득하며 임시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미국대로 임시정부 승인이 불가능한 이유를 여러가지를 들면서 반대하여 양자의 대립은 심화되었다. [11]:299
3월 30일 미국 육군장관에게 하와이 한인동포들을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으로 대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냄. 육군장관으로부터 다르게 취급하겠다는 회신을 받았다. 5월 15일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극동에 대한 소련의 야욕을 상기시키고 임정 즉각 승인과 무기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 발송하였으며, 8월 23일 캐나다에서 열린 제1차 퀘벡 회의에 참석한 루즈벨트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에게 전보로 임정 승인과 군사지원을 요청하였다. 그해 8월 이승만은 한미협회와는 별도로 종교적 후원단체인 기독교인친한회(The Christian Friends of Korea)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한국 의료선교사 애비슨, 아메리칸대학 총장 폴 더글러스 등을 중심인물로 내세웠으며, 이후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지원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1943년초 이승만은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소전선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 것을 요구하였다.[49] 1943년 카이로 선언에서 미국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그해 12월 이승만을 지지하는 대한인동지회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12월 19일부터 12월 22일 가이 질레트 미국 상원의원으로부터 임정 승인이 불가능하다는 서한을 받자, 몇몇 동지들과 함께 항의 방문하였다.
1944년 7월, 이승만의 노력으로 미국 체신청이 태극마크가 들어있는 우표를 공식 발행을 성사시키기도 했다. 1944년 10월 18일 미국 체류 중인 이승만은 중국 충칭에 있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에게 영문으로 편지를 발송, 1944년 11월에 미국정부가 한국인의 대일항전을 기념하기 위해 5센트짜리 태극우표를 발행한다는 내용을 통지했다. 11월 미국 체신청에서 태극우표를 발행하자 이승만은 한국의 독립을 미국이 지지한다는 증명으로 태극마크를 도안하여 우표를 발행하였다는 사실을 알렸고, 발행된 태극우표 3점을 동봉하여 충칭 임시정부로 발송해주었다.
항일단파방송 선전활동[편집] 단파 방송 밀청 사건, 미국의 소리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미국의 소리는 미국 정부가 전 세계의 청취자를 향해 방송운영하는 국제방송을 말하는데, 이승만은 6월-7월부터 매일 미국의 소리(VOA) 초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29일 처음 방송되었는데, 8월 29일 이승만의 제안으로 첫 방송을 시작했었다. 당시 미국의 소리방송은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전쟁상황을 알려주는 역할을 했었다.
일제 강점기, 1942년에 경성방송국에서 근무하는 한국인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송출되는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을 듣곤했는데, 여기서 이승만이 1942년 6월 13일, 미국의 소리 라디오로 통해 미국 워싱턴 D.C로부터 '일제는 전쟁에 패하고 있다. 우리 임시정부는 미국의 승인을 얻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가할 날이 가까워 오고 있다. 나의 사랑하는 2300만 동포여, 우리가 독립을 위해 건국을 준비하여야 하며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에 영원할 것이다.'는 주 내용으로 한반도에 소식을 전하였던 사건이었다.[50] 당시 이 라디오 단파방송을 들었던 이들은 극히 소수였는데, 이는 밀청했던 사람들로부터 입으로 전래되고 알려지게 되어 훗날 국내에서 이승만에 대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된다.
전서울 중앙 방송국 기자로 지냈던 문제안의 증언에 의하면 '항일 단파 라디오 방송은 힘은 많지 않지만, 아주 막연하게 저 하늘에 있는 구름 같이 먼 데 아주 알 수 없는 곳인데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려고 하는 우리를 지켜려는 누군가가 있다. 이런것을 아주 가냘픈 희망이 있지만 그런 마음이 있었다.'라고 증언하였다.[51][주해 4]
이때 워싱턴에서 항일단파방송을 하였던 이승만의 공식직함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이었다.
이 항일단파방송을 몰래 밀청하다가 일제 총독부에 의해 잡혀간 사람들이 적지않게 있었는데, 이들 증언에 따르면, '임시정부가 중국이 아닌 미국에 있고, 이승만이 대통령이라는 소문까지 퍼지기도 했다.'라고 한다.
이승만의 항일단파방송 육성원본은 오늘날 천안에 위치한 독립기념관에 보존되어 있다.
OSS 지원 요청[편집]임정은 한국광복군의 특수훈련을 계획하고 미국국무성의 협조를 기대한다. 임정의 연락을 받은 이승만은 미국국무성 및 국방성과 교류하며 임정의 광복군과 미국 OSS의 합동훈련을 중개하게 된다.
1942년 5월 5일 이승만의 미국 내 후원조직인 '한미협의회' 회장 제임스 크롬웰이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임정 승인을 촉구하였고, 42년 9월 30일 이승만은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의 로센봄 중위, 국무부 차관보실의 로스토우 등을 만나 중국내 한국인 게릴라 부대 조직의 후원 문제를 협의하였다. 10월 10일 다시 미국 육군전략사무처(OSS)를 찾아 프레스톤 굳펠로우 대령에게 항일 게릴라 조직 제의. 10월 미국육군전략사무처의 협조를 얻어낸 뒤, 임정에 이를 통보하고 임정으로부터 한국인 선발요원 50명의 명단을 OSS에 통보하였다. 1942년 12월 4일 12명의 한인이 선발되어 군사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12월 7일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인 군사훈련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12월 31일부터 1943년 2월 16일까지 이승만은 계속 미국 국무장관 코델 헐에게 면담을 요청하였으나 미 국무장관 코델 헐이 만나 주지 않자, 편지로 만약 미국정부가 임정을 승인하지 않으면, 전후 한반도에 친소련 공산정권이 수립될 것임을 경고하였다.
1943년 2월 17일 미국 육군장관 헨리 스팀슨에게 편지를 보내, 항일 게릴라 조직계획서를 제시하였다.
귀국 직전
1945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 국제회의에 파견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위원(앞줄 가운데가 대표단장 이승만,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윤병구·정한경·유경상·임병직, 앞줄 왼쪽부터 이살음·대표단장 이승만·송헌주 순)1944년 8월 21일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임정를 승인해줄 것을 거듭 촉구하였다. 9월 11일 이승만은 제2차 퀘벡 회의에 참석한 루즈벨트와 영국 총리 처칠 경 에게 다시 카이로 선언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일본 패망 후 한국의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전보를 보냈다. 이승만의 독립승인 요청에도 불구하고 미국무부 내의 반대파와 공산주의자들은 임시정부의 승인을 강력히 반대하였고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1943년에 카이로 선언에서 약속한 한국의 독립을 번복하고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소련의 스탈린과 한국의 신탁통치를 합의하였다.
1945년 2월 5일 이승만은 미국 국무 차관 조셉 그루에게 전보를 발송, '한반도에 공산정권을 수립하려는 소련의 야욕을 막는 방법으로 임정을 즉시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3월 8일 미국 국무장관 에드워드 스테티니어스에게 4월에 열릴 샌프란시스코 유엔 창립총회에 임정 대표를 초청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3월 9일 부인 프란체스카 도너를 대동하고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영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 여사를 면담하였다.
1945년 5월 유엔 창립총회에 참석하려는 한국인들에게 중국의 외교부장 송자문(쑹쯔원)이 좌우합작을 주장한 데 대해 맹렬히 반대성명을 발표했다. 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엔창립총회에서 이승만은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얄타에서 한반도를 소련에 양도해 주었다는 정보를 접한 뒤 소련을 맹공격하는 선전을 하였다.[11]:99 이때 이승만이 돌린 반소 전단지가 소련측 대표들의 수중에도 들어가게 되어 소련 외상이자 소련 수석대표인 몰로토프(Vyacheslav M. Molotov)는 이승만과 임시정부를 극도로 적대시하게 되었다.[11]:99 김성숙(金星淑)은 중국공산당의 유일한 유엔대표였던 둥비우로부터 소식을 전달받고 임정 국무위원회 석상에서 이승만을 주미외교위원장직에서 해임하고 임정은 소련에 해명과 사과를 해야 된다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1]:99 5월 14일 얄타 회담에서 미국과 영국이 한국을 소련의 지배로 넘겨주기로 비밀협약이 이루어졌다는 주장을 발표하여(얄타밀약설) 미국 국무부와도 충돌하게 되었다.
1945년 8월 소련은 한반도에 점령군으로 진주하면서 이승만을 반소적인 인물로 지목, 그 뒤에 벌어지는 일련의 정치과정에서 이승만의 참여를 사실상 배제하기로 계획하였다.[49] 1945년 8월 23일 소련군은 스탈린과 외무부의 비신스키차관에게 보낸 보고에서 이승만을 "한국의 망명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반동적이고 반소적인 인물"이라 보고하기도 했다.[49] 소련군은 이승만을 반소적인 인물로 평가하는 이유로, "이승만이 43년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한국정부의 승인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면서 반소전선을 구성할 것을 요청한 것"을 근거로 했다.[49]
1945년 10월 16일 중앙청에서 귀국인사를 하는 이승만과 그를 수행중인 윤치영일본 천황이 방송을 통해 항복을 발표한 1945년 8월 15일 정오는 워싱턴 시간으로 14일 밤 11시였다. 이 뉴스를 들은 이승만은 그 날 밤을 거의 뜬눈으로 새웠다. 그는 부인 프란체스카에게 되도록 빨리 자신이 먼저 귀국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프란체스카는 이미 각오하고 있는 터였다. 이승만은 15일 아침 워싱턴에 사는 한국 교포 30여명을 구미위원부로 불러 축하파티를 열었다. [52] 8·15 광복 직후 이승만은 즉시 귀국하려 하였으나 이승만을 기피인물로 여기는 미국 국무부가 쉽게 여권을 내주기 어려워 2개월간 발이 묶여 있었다. 이승만은 1945년 9월 5일 국무성 여권과장 루드 쉬플레어 여사를 통해 여권발급허가를 받았고 국방성 스위니 대령의 주선으로 미군작전지역인 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허가도 일단 얻었다. 그러나 국무성은 곧 주미한국외교대표라는 이승만의 호칭을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여권발급허가를 취소해버렸다. 이승만은 즉각 호칭을 포기하겠다는 태도를 밝혔지만 국무성은 뚜렷한 이유를 대지 않은 채 계속 여권발급을 거부하다가 나중에는 더 이상 그의 일에 간여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나왔다. [53]
1945년 8월 하순 이승만은 미군 인사들과 연락, 굿펠로 대령의 도움으로 미 여권국으로부터 여행증서를 받고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던 한국에 입국하려고 맥아더의 극동사령부(GHQ)로부터 입경 허가서를 받아 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미국 국무부는 이승만의 허가서에 '고급 집정관(High Commissioner)'이라는 표현이 있음을 문제삼아 정정을 요구했다. 이 문제가 생긴 것은 9월 23일이었다. 이 표현을 삭제한 뒤에야 여행문서를 재발급받았다.[11]:312~314 1945년 9월 7일 조선인민공화국의 주석에 선임되었다.[54] (조선인민공화국 참조) 그러나 취임을 거절하였다.
귀국 전후 (1945 ~ 1946)
1945년 10월, 귀국 환영회에서의 이승만.1945년 10월 4일 뉴욕, 그 간 미국을 주된 활동 무대로 삼아 외교 중심의 독립운동을 해온 이승만이 귀국길에 올랐다. 이승만은 하와이와 괌을 거쳐 12일 도쿄에 도착한 뒤 그곳에서 맥아더를 만나 며칠 머문 다음, 미국 군용기를 이용하여 10월16일 오후 5시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이승만의 귀국 경위는 매우 복잡해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의견 통일이 돼 있지 않지만, 널리 통용되고 있는 견해는, 미 국무성은 이승만의 귀국을 반대했지만, 미 군정청장 존 하지 중장이 그의 귀국을 원했다는 것이다.[55]그의 귀국은 다른 독립운동지도자보다 이른 것이었다. 이승만이 비교적 연합국 측에 잘 알려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귀국 다음날인 1945년 10월 17일 오전 10시 존 하지의 안내로 군정청 제1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존 하지의 대접은 극진했다. 저녁 8시 30분에는 서울 중앙 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방송을 했는데, 당시 그의 연설 요지는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였다.
미군정청 사령장관 존 하지, 이승만은 이후 그와 수시로 마찰을 빚는다.이승만이 귀국후에 벌인 첫번째 대미교섭은 임시정부요인들의 환국문제였다. 이승만은 존 하지에게 임정을 정부 자격으로 귀국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령관 하지는 답변을 회피한다.
이승만은 측근들에게 "존 하지가 임정을 불한당 집단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여러번했다. [56] 그러나 이승만 역시 속으로는 임시정부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선 임시정부가 "정부" 자격으로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았다.[출처 필요] 자신을 중심으로 새로운 정부를 세우겠다는 뜻을 품은 이승만으로서는 임시정부가 대내외적으로 법통을 인정받는 형식으로 귀국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57]
귀국 당시 이승만은 남한의 좌우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모두 그의 지도를 받기 위해 모여든 것에 크게 고무되었다. 미군정 또한 그의 지도력을 원했다. 이에 이승만은 10월 21일 ‘공산당에 대한 나의 감상’이라는 방송 연설을 통해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라고 하여 공산주의를 포용하겠다고 선언했다.[58]
그가 귀국하자 국내의 후견인이자 독립협회 때부터의 동지였던 윤치호가 만나줄 것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윤치호를 만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었다.
귀국 환영회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의 환영회를 할 때 조병옥은 이승만을 맨 앞의 좌석에 앉게 하도록 건의하였다. 10월 16일 이승만은 사실상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기로 되었는데 어떻게 앞자리에 앉게 할 수 있겠느냐 하고 하지 장군이 항의를 하자 조병옥은 대답하기를 "이승만 박사는 비록 평민의 자격으로 환영회에 참석하게 될 것이지만 그는 독립운동의 원훈이므로 당연히 앞자리에 앉아 여러분을 환영해야 한다."고 이틀 동안이나 주장하여 관철시켰다.[59]
하지 장군은 결국 조병옥의 말에 수긍하고 자기 스스로가 이승만 박사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하지 장군이 답사를 마치고하단하자 이승만 박사는 만면에 웃음을 띄우고 하지 장군과 정답게 악수하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59] 이어 조병옥은 직접 이승만 환영사를 낭독했다.
“ 이제 우리 한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영웅적으로 용전분투한 역전용사 미군을 환영하는 이 마당에 우리는 40년간 우리 한민족을 착취하고 압박하던 이 백아전당(白亞殿堂) 앞에 우리의 자유독립의 상징인 백발이 성성한 이승만 박사가 바로 이 자리에 나와 계십니다."하고 이승만을 소개하였더니 덜어선 회장의 수만은 청중들에게서 우레같은 박수소리와 함께 감격의 울음소리가 이곳 저곳에서 퍼져나왔다.
박수소리가 끝나는 것을 기다려 조병옥은 연설을 계속하였다. "이 백아전당은 희고 깨끗이 단장되어 있지만 그 속에서 일보던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은 우리 한민족을 어떻게 해야만 많이 착취하고 일본에 예속되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을 계획하고 집행한 저주받은 아성입니다. 그러나 이 백아전당의 흰 것과는 달리 우리민족의 자유독립의 상징인 이승만 박사의 백발은 40여년 간의 해외의 모진 풍상을 다 겪어가면서 검은 머리가 흰 머리가 되도록 오직 조국의 광복만을 위하여 투쟁한 인생의 산 역사를 말하는 백발의 기록이며 상징일 것입니다.[60] ”
조병옥이 말을 맺었을 때 다시 우레같은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하지 장군은 직접 답사와 함께 이승만의 약력을 직접 소개하였다. 조병옥에 의하면 '하지 장군도 이 우레같은 박수 소리에 압도되어 자기가 답사를 하지 않을 수 없어 결국 이승만의 소개를 하였다고 생각한다.'고 평하기도 했다.[60]
한민당 영수직 거절
이승만은 미국 국무성의 편의 제공으로 귀국한 만큼, 미 군정에 대해서나 미국 행정부에 대해서나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61] 10월 16일 오후 허정은 미 군정 당국의 연락을 받고 이승만이 여장을 푼 조선호텔로 찾아갔다.[62] 허정은 이승만과 대좌, 국내 정세를 설명했다. 허정은 '무엇보다도 이 박사가 겨레의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좌익의 움직임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도 덧붙였다.[61]
그 자리에서 허정은 한민당의 창당을 알리고 그에게 영수 추대를 수락하도록 권고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수락을 거절했다.
“ 한국민주당이 조직되었다는 것은 참으로축하할 일이지만, 나로서는 영수직을 맡을 수가 없소. 한민당이 싫어서는 아니오. 나도 미국에 있으면서 민주주의 정치에서 정당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고 있지만, 지금 내가 할 일은 한 정당의 지도자가 되는 일을 아닐 것이오. 나는 일당 일파의 영수가 아니라 온 국민의 벗이 되고 싶소. 지금 내가 할 일은 온 민족을 단합시켜 한뜻을 갖고 일하게 하는 것이오. 지금 내가 한 정당에 소속한다면 반드시 이루어야 할 전민족의 단합이라는 더 큰 일을 버리는 것이 될 것이오.[63] ”
허정은 여러번 설득했지만 이승만은 한 정당 정파의 리더가 되기는 싫다고 답했다. 이승만의 성품을 알고 있던 허정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63]
독립촉성회 결성
비서실장 윤치영, 이후 56년 이기붕 세력에게 밀리기 전까지 그를 최측근에서 보좌한다. 독립촉성중앙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5년 10월 중순 윤치영 등의 독지가들의 주선으로 돈암장에 입주한다. 그가 미국에 체류했을 때 이미 그의 열렬한 추종자가 된 허정, 장덕수가 돈암장에 출입했고, 윤치영, 이기붕 등은 그의 비서역을 자처했다.
1945년 10월 23일 각 정당·단체 대표 200여 명이 모여 이승만을 정점으로 소집한 회합에서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는데 여기에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등 공산 정당도 모두 포함돼 있었다.[64](독립촉성중앙협의회 참조)
1945년 12월 3일.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이후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0월 31일 이승만은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박헌영을 돈암장에 불러들였고, 두 사람의 이날 회담은 원만하게 타결된 듯 보였다.[65] 그러나 회담에서 논의된 선친일파 숙청을 주장하는 박헌영과 건국후 처벌을 주장하는 이승만 사이에는 합의점을 찾지 못하였다. 11월 3일 이승만의 통일안에 대해 조선공산당이 반대성명을 발표했고, 11월 21일 이승만도 <공산당에 관한 나의 관념>이란 방송 연설을 통해 공산당의 본질에 관해 설파했다. 이후, 돈암장에 머물렀다가 거처를 이화장으로 이동했다.
상해 비행장에 내린 임정요인들이 공항에서 환영나온 교민들과 기념사진11월 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 제1진이 귀국하였다. 이승만은 친히 김포비행장으로 나가 김구, 김규식 등 환국 요인들을 영접하였다.
1945년 11월 23일 이승만은 조선일보의 복간을 축하하는 축하 성명을 발표하였다.[66] "조선일보가 왜적(倭敵)의 압박 밑에서도 민족의 개명(開明)과 국권(國權)의 회복(恢復)을 위하야 분투항전(奮鬪抗戰)한지 다년(多年)이었는데 왜적의 시기와 탄압으로 말미암아 폐간하게 이름을 우리가 피가 끓게 통념(痛念)히 여겨온 바"라며 "금일 우리의 위급한 이 시기에 조선일보가 다시 부활하여 출세(出世)됨을 우리는 한없이 기뻐하며 환영한다"고 축하했다.[66] 11월 26일 이승만은 '전체 국민은 총단결하여 임시정부를 적극 지지하자'며 국민에게 호소하였다.[67] 11월 30일 노기남 대주교의 초대로 주교관 만찬에 참석하였다.
임정요인 환영식에 이승만과 김구 (1945.12.01)1945년 11월말과 12월 초 돈암장으로 재력가 20여 명을 불러모아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려는 모든 국가지도자들은 경제적으로 부유한 시민들의 지원을 받는다. 조선에서는 이렇나 지원이 매우 부족하다”면서 경제보국회 결성을 독려하였다.[68]:223 [69] 1945년 12월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임시정부 환영회 참석하였다. 하오 2시 20분경 조선생명회사 2층에서 김구를 중심으로 좌우에 이승만, 이시영, 김규식, 류동렬 등이 창을 열고 환영행렬을 맞이하였다.[70] :145 1945년 12월 1일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초대하였다. 김구와 김규식은 이승만의 초대를 받고 12월 2일 돈암장을 방문, 2시간 동안 회담하였다.[70]:146
1945년 12월 16일 방송을 통해 공산주의자들의 파괴행동에 경계가 필요하다는 공격을 하였다.[71] 1945년 12월 24일 한국 소년군 총본부 고문에 추대되었다.[70] :221
해방 정국 (1946 ~ 1948)신탁통치 반대 운동
김구를 군정청 사령장관 하지에게 소개하는 이승만 (1945년 11월)
이승만의 소개로 하지와 면담 (1945년 11월)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신탁통치 반대(탁치반대)를 결의하였다. 1945년 12월 29일 김구, 김규식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김규식은 곧 반탁 대열에서 이탈하였다. 1946년 1월 14일 이승만은 공산당을 매국노라고 단정하고 공산당과의 일체 타협을 거부하였다. 허정은 이를 두고 소련의 찬탁하라는 지시를 받고 바로 찬탁으로 돌아선 '좌익의 사대주의 때문'이라 하였다.[72] 그해 1월 이승만은 미국으로 건너가 국무성 담당자들과 접촉을 시도했고, 이승만의 미국 도미를 불허하는 미군정의 반대로 이승만의 도미는 난관에 부딪혔으나, 출국을 감행했다. 이때 국내외 우파 단체의 자발적인 모금으로 이승만의 도미 여비가 마련되었다.
1946년 1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정되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미소공위 반대와 공위 불참을 선언했다. 그러나 김규식은 공위 찬성의 입장에 서게 됐다. 한국민주당의 장덕수가 이승만을 방문하여 이승만에게 미소공위 참가를 설득했으나, 이승만도 이를 거절하였다. 1월 16일부터 2월 6일까지 미소공위 예비회담이 열렸다.
1946년 2월 1일 대한민국 비상국민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이승만은, 김구, 김규식, 조만식, 권동진, 김창숙, 오세창, 홍명희 등과 함께 비상국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다.[73] 2월 8일 조선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통합한 대한독립촉성국민회(大韓獨立促成國民會)가 설립되자 이승만은 총재로 추대되었다.
귀국 직후 촬영한 영정사진 (1945년 10월)
1946년 5월의 미소공위 회의장에서 열린 신탁통치 반대 운동1946년 2월 13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직으로 선출되었다. 이 자리에서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 설치를 결의하고 비상국민회의는 이승만, 김구에게 최고정무위원 선임권을 주었다. 이승만과 김구는 28인의 최고정무위원을 선발했다.[73] 2월 14일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68]:2062월 14일 아침 미군정청 1회의실에서 민주의원이 개소된다는 보도를 접한 김창숙은 이승만·김구가 민족을 파는 반역자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73] 민주의원 지도부 구성은 이승만과 김구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좌익은 배제되었다.[68]:225
46년 2월 이승만은 김구를 위원장으로, 김성수를 부위원장으로 하는 반탁독립투쟁위원회 고문으로 선출되었다.[74]
1946년 3월 1일 김구와 함께 3.1절 기미독립선언기념전국대회를 주관하였다. 1946년 3월 19일 민주의원 의장직을 사퇴했다.[75]:235 표면상 이유는 건강 문제였지만, 사실은 미 군정이 다음날 개최될 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두고 철저한 반소(反蘇)주의자이며 신탁통치안을 격렬히 비판해 온 이승만을 정치 일선에서 배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었다.[75]:235 미군정은 의장 대리에 김규식을 앉혔다.[75]:235[76] [77] 미군정은 이승만을 이화장에 반(半) 연금상태로 묶어두었다. 정문에는 미군 헌병을 세워두고 출입자들을 하나하나씩 체크했으며, 미군정청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미군용 전화도 이화장에서 떼어갔다.[75]:235 [77][78] 당시 한국 민간인 중 미군 군용 전화가 가설된 집은 이승만과 김규식의 집뿐이었으며, 3월 20일 이승만 집의 전화를 끊었다.[75]:235
46년 3월 22일 우파정당 통합에 나선 한독당은 국민당과 통합을 선언하였으며, 이때 김구는 이승만에게 한독당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초당적인 국민운동'을 내세워 이를 거부하였다.[75]:235 [79]
미소공위 반대
1946년 제1차 미소공위. 왼쪽부터 이승만,김구,스티코프,안재홍.1946년 3월 20일에 열린 미,소 공동위원회에서 소련측은 미국측이 예상했던 대로 모스크바결정을 지지하지 않는 반탁세력은 임시정부 구성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난항을 거듭하던 미소공위는 소련측이 양보하여 반탁투쟁을 했더라도 이후에 그러한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80] 임시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방안을 제시했고 이것에 토대를 두어 공동성명 5호가 발표되었다.[81] 이승만은 서명에 동의하지 않다가 미군정의 압력으로 서명에 동의하게 되었다.
1946년 4월 이승만과 김구는 밀사 김욱을 조만식에게 파견하였다. 밀사로 파견된 김욱을 접견한 조만식은 자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방임하면서도 직접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대신 밀사는 조만식의 유고시 그를 대행하는 이윤영의 서명을 받아서 이승만과 김구에게 제출했고, 소련 측에 대한 반박자료로 미·소공위에 제출되었다.[82]
덕수궁 석조전. 이곳에서 미소공위가 개최되어 좌우합작위원회 회담이 열리곤 했었다.그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극력 반대하였다. 장덕수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추진시킨다고 이를 반대하는 이승만이나 김구와는 달리 미소공위에 참석하여 한국인의 견해를 당당히 표명하기 위해서는 미소공동위원회와 협의해야 하다고 주장했다.[83]
1946년 5월 19일 이승만은 미소공위에 불참할 것을 공식 성명으로 발표했고, 김규식은 반박성명을 내고 전체 애국자는 적극 미소공위에 참가하라고 공식성명을 발표했다.[84] 그러자 이승만의 측근이던 박용만은 “김규식 박사의 주장에 따른다면 미소공동위에 끝까지 불참을 표명했던 이승만 박사나 김구 선생은 애국자가 아니고 자기만이 애국자라는 어처구니 없는 결론”이라며 비난하였다.[84]
북한이 공산주의화 되어가자, 1946년 6월 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가진 유세에서 선거가 가능한 지역에 한해서 정부 수립을 할 것을 주장했다. 1946년 5월 경제보국회로부터 1천만원의 정치자금을 제공받았다. 경제보국회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우익 정치인들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는데, 이들 중 가장 큰 혜택을 받은 것은 이승만이었다.[68]:2236월 29일 민족통일총본부가 설치되자 이승만은 민족통일총본부 총재에 선출됐다.[75]:257 1946년 8월 3일 여운홍의 사회민주당 결성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했다.[85]
미소공위에 대한 저항 운동[편집]1946년 7월 이승만은 상하이 임시정부를 계승한 형태로든지, 선출된 실행위원회에서 임명된 형태로든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촉구하면서 미소공위에 도전했다. [86] 그러한 정부의 지위는 선거가 실시될 때까지 단순한 과도정부가 되어야 한다고 이승만은 밝혔다. 그리고 여러 정치써글에서 논의된 정부구성에 관한 의견들을 언급하면서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고 우리 손으로 신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미소공위의 결과가 우리의 기대와 일치한다면 그때는 정부를 구성하려는 계획을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것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86]
이승만은 신탁통치를 완강하게 거부함과 동시에 미소공위 역시 깨져야 된다고 주장했다. 허정에 의하면 당시 '한민당 안에서는 신탁통치를 전제로 하는 미소 공위 참석 여부를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그러나 한민당이 참석하지 않은 채로 그 협정에서 정해진 임시정부 수립이 결정된다면 그 후 한민당은 물론이고 우익 진영도 발언권을 상실하므로 일단 참석하여 반대 의사를 관철하기로 결정하였다.' 한다.[87] 이승만이 강력 반대를 하므로 한민당은 어쩌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태도는 완강하여, 한민당에 대해서도 미소 공위 참석을 거부하라고 종용했다.[87] 하지 중장은 이승만을 설득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이승만은 끝까지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이승만의 미소공위 반대에 하지 사령관은 골칫거리를 만났다며 골치아파했다. 이승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미소공위는 어느 정도 진척을 이루었다. [86] 허정은 돈암장으로 이승만을 찾아가 한민당이 미소 공위에 참석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87]
“ 선생님이 반대하시는 뜻은 이해가 갑니다. 또한 저 자신도 (미소공위나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를 하려면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미소 공위의 개최는 미국의 정책입니다. 미국의 군정하에 있는 지금, 그들의 정책을 극단적으로 반대한다면, 결국 그들은 우리를 제외하고 그들의 정책을 밀고 나갈 것입니다. 우리가 전혀 관여하지 못하게 되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국은 더 좋아할 것이고 그 결과는 엉뚱한 것이 될 지도 모릅니다. 그런 만큼 선생님은 반대하시더라도 가만히 계십시오. 반대 의사를 적극적으로 밝히시되 반대 운동에 적극 나서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88] ”
허정의 장기간 설득은 통하여 이승만은 미소공위를 반대하되, 적극적으로 나서서 미소공위 반대 시위를 주도하지는 않았다. 허정은 이를 두고 '이 박사는 고집이 센 반면에 옳은 말은 깨끗이 받아들이는 담백한 일면이 있었다.[88]'고 했다. 허정은 또 만일 이박사가 끝까지 반대 의사를 적극적으로 고집했다면 한민당 등 이 박사 지지 세력은 딜레마에 빠졌을 것이다. 일단 이 박사의 묵인 끝에 한민당은 미소 공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88] 제1차 미소 공위가 결렬되면서 반탁운동은 더욱 고조되었으며,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 운동에서 공동 보조를 취하였다.[88]
그러나 이승만의 미소공위 반대에 미군정은 골치아파했다. 미군정은 비밀리에 이승만을 정치적으로 거세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승만은 1945년 11월 3일 이래 좌익 우익 합작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실패로 말미암아 그 역량이 박헌영을 따를 수 없다는 평을 받았으며 또 이승만은 완강한 정치인이라고 해서 한국 정치계에서 제가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89] 김구 주석은 극렬한 반탁운동을 하였기 때문에 미국의 신망을 얻지 못하였다.[89] 이승만과 김구는 정국의 반전을 꾀한다.
한편 이승만, 김구 등은 서북청년단에 종종 경제적 지원을 해주곤 했는데 대부분 일회성이었다.[90]
1946년 6월 3일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주장한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보도한 서울신문 1면 기사.1946년 5월 20일, 전남 목포에서 이승만은 반공주의적인 발언을 하게 되는데 이는 향후 자신의 정치노선을 분명히 드러낸다.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보내야 한다. 가족의 일원이라도 거부하라. 공산주의자는 파괴주의자이므로 전부 체포할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 남조선에 단독정부를 세워 3.8선을 깨트리고 소련군을 내어 쫓고 북조선을 차지할 것이다."[91][92]
이러한 그의 과감한 발언으로 그는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들로부터 '늙은 보수꼴통'이라고 비난받기도 하였다.
46년 6월 11일 서울 정동교회에서 열린 독촉국민회 전국대표자대회에 참석하였다.[75]:257 이승만은 이날 연설에서 "소련 사람을 내보내고 공산당을 이땅에 발못붙이게 하자,"고 역설하면서, "최고사령부라고나 할까, 최고의 명령을 내리는 기구를 조직할 터이니 이 명령에 복종함을 맹세"할 것을 요구하였다.[75]:257[93][94] 그러자 김구는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라고 화답하였다.[75]:257[95][96]
46년 8월 15일 미 군정청에서 열린 8·15 해방 1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하지 중장에 이어 인사말을 했다.[97] 1946년 9월 10일 독립정부 수립 문제를 미소공동위원회로부터 유엔에 넘길 것을 요구하기 위해 임영신을 미국에 파견하였다.[71] 9월 12일 돈화문 앞에서 공산주의자의 권총저격 미수를 당하였다.[71]
1946년 11월 우익단체들이 통합하여 서북청년단이 결성되자 이승만은 김구·한민당과 함께 서북청년단에 자금을 지원해 주었다.[98]
도미 외교[편집]1947년 1월 이승만은 미국을 방문하였다. 1946년 1월 이승만은 미국을 떠나기 전에 우익세력과 함께 반탁운동을 추진하되 김구가 체포되어 투옥될 정도로 격렬하게 하도록 사전에 말을 맞추었다.[75]:13그러나 계획은 미군정 첩보망에 걸렸고 이승만은 1월 16일 미국 워싱턴에서 국내에 전문을 보내 김구에게 과격 시위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게 되었다.[75]:13
그가 미국에 있을 때 김구와 대한민국임시정부 계열은 3.1절을 전후하여 독자적으로 정부수립을 기도하였다. 이승만과 한국민주당은 김구와 임정의 행위를 국제정세를 모르는 자살행위라며 비판하였다.[75]:15 1월~2월 이승만 주도의 독립촉성중앙회는 김규식 중심의 좌우합작위원회를 '독립운동'의 반역집단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의 회색행동을 철저히 소탕할 것을 결의하였다.[99]
1947년 3월 3일 임시정부 국무위원을 보선할 때 이승만을 임시정부 주석, 김구를 부주석으로 추대하였다.[100][101] 김규식, 장건상, 김붕준(金朋濬) 등 중도우파 국무위원은 보선에서 배제되었다.[101] 그리고 1947년 9월 5일의 국무위원 보선에서 재선되었다.[102] 3월 12일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이를 쌍수로 환영하면서 이것이 모든 나라에 서광을 비추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해리 S. 트루먼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내 한국에 이 정책을 수용케 함으로써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협조를 이끌어내려는 미군정의 정책을 포기토록 권하였다. 또한 '미국 지역 내에서 즉각적인 과도 독립정부를 수립함으로써 공산주의의 진출에 대한 방파제를 구축'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75]:24~25
1947년 4월 5일 미국 방문을 마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도중, 일본에서 맥아더를 만났고, 중국에 들러 장제스와 국민당 정부의 환대를 받았다.
1947년 4월 21일 비행기편으로 경기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였다. 김구는 김포공항에 나와 그를 친히 마중하였다. 이승만이 귀국하던 날, 김구는 김포에 마중을 나가 단정론 연설만은 그만두도록 충고하였다.[103]
4월 23일 귀국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7일 열렬한 환영 속에 열린 귀국 환영대회에서 이승만은 입법위원이 총선거 법안을 만들어 남한 과도정부, 즉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하며 이제 김구와 김규식은 임정법통론과 좌우합작론을 모두 포기하고 나와 같이 보조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75]:28 1947년 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자 이승만과 김구는 반탁투쟁을 전개했다.[81] 5월 21일 예정된 제2차 미소공위 개최를 앞두고 단독정부 수립론을 공격적으로 외치는 이승만은 위험인물로 간주되어 하지의 지시에 의해 연금상태에 들어갔다.[75]:29
1947년 6월 19일 미소공위 참석 문제를 놓고 제단체 간 이론이 있자, 한민당은 '참여하여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공위 협의에 참가할 것을 주장하면서 6월 19일 74개 정당 사회단체로 구성된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를 구성했다. 이에 대해 이승만은 '회의에 참가해서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말은 우리로서는 해석키 곤란하다. 속이고 들어가서 반대하겠다는 것은 자기의 신의를 무시하는 자'라고 불만을 토로하였다.[75]:31~32[104] 한국독립당에서도 미소 공위의 참석에 찬성하는 혁신파와 민주파는 한독당을 이탈하여 신한민족당과 민주한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해 이승만과 김구만 고립되었고, 한민당의 변화에 분노한 이승만과 김구는 공위 협의 청원서 제출 마감일인 1947년 6월 23일 김구와 함께 여러 곳에서 반탁 시위가 벌어지게끔 주도하였다. 6월 23일 이철승과 전국학련 주도로 반탁궐기대회가 열렸다. 이승만은 전보를 보내 반탁 시위대를 격려하였다.[75]:32~33[105] 6.23 반탁데모로 전국학련의 반탁시위대가 소련측 공위 대표단에게 돌을 던지는 등의 맹활약을 하였으며 학생시위대 시위가 끝난후 시위대는 이승만을 찾아 경과를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승만은 그들을 격려하며 이철승에게 '자네는 건국공신이야 큰일을 해냈어'라 하며 칭찬하였다.[75]:32~33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의 격려에도 6.23 반탁시위는 10만명을 동원했다는 우익신문들의 보도와 달리 3, 4천명에 불과해 대규모 군중동원에 실패하고 말았다.[75]:35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1947년 7월 10일~7월 12일 전국에서 올라온 대의원 200여 명을 모아 제1회 한국민족대표자 회의를 개최하여 자신의 단정 노선을 역설하였다.[75]:36
1947년 8월, 미 군정 관계자에게 테러리스트들의 좌익 공격을 금지할 수도 없고, 금지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1947년 9월 17일 미군정이 조선문제를 유엔으로 이관하겠다고 발표했다. 소련은 강력 반발하였지만 이승만은 김구, 한민당과 함께 이를 크게 환영하였다. [75]:60~619월 21일 이청천(李靑天)이 단장으로 있는 대동청년단의 총재로 취임하였다. 10월 18일 윤치영 등 측근들과 독지가들의 모금으로 마련된 이화동의 이화장(梨花莊) 사저에 입주하였다.
김구와의 결별
장덕수. 한민당내 이승만의 지지자였던 그의 암살을 계기로, 김구와의 감정이 악화, 결별하게 된다. 장덕수 피살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유엔감시하의 한반도 자유선거 실시를 가결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1월 24일 김구는 남한 단독선거는 국토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발표했다가 11월 30일 이승만을 방문한 뒤 번복하여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김구의 방문을 받고 한시간여 요담을 한 후, 김구는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고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 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김구의 성명 발표 후 이승만은 김구와 함께 서북청년단 1주년 기념식에 참석회 훈화를 하였다.[106] 그러나 협력관계가 강화되어 가던 12월 2일 발생한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둘의 관계는 파국으로 가게 되었다.
1947년 12월 2일 김구는 장덕수 암살 배후로 지목되어 미군정에 소환당했다. 김구는 이승만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이 법정에 서지 않게 해달라고 이승만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승만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107] 이승만이 장덕수 암살사건으로 위기에 처한 국민회의를 방관하면서 한민당과 연대하며 독자적으로 '한국민족대표단'을 구성하자 김구는 배신감에 크게 분노하였다.[107]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108] 이승만과 김구의 연대에 비판적이던 한민당은 이 사건을 정치적인 호재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이승만의 민족대표단은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장덕수가 암살되었을 때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로 지목했고 그 후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수모를 당한 후로 이승만과 결별하게 되었다.[108]
1948년 3월 8일 이승만은 언론에 장덕수의 사건에 김구가 연루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부하 몇사람 행동이 김구에게 누가 끼친 것은 유감이라는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였다.[109]
"고 장덕수씨 사건에 김구가 관련되었다는 말은 얼마 전에 들었으나 근일 항간에 허무한 풍설이 많이 유포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는 별로 신뢰치 않았던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신문에까지 보도되고 있는 때이므로 나로는 사실을 모르고 좌우간 단언할 수 없으나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 김주석 부하 몇 사람의 무지망동한 죄범으로 김 주석에게 누가 미치게 한 것은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앞으로 법정의 공정한 판결이 있을 줄 믿는다."[70] :331
이승만은 장덕수의 암살범을 김구라고 확신했고, 경교장 측에서 지원, 구명 요청이 왔으나 모두 거절한다.
단독 총선거 직전[편집]1948년 1월 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한국에 도착하자, 이승만은 유엔한위를 마중나가 환영군중대회에서 연설하였다. 1948년 1월 12일 UN한국위원회가 서울에 도착하자 회의에 참관하였다. 그러나 UN위원단 단장인 인도인 메논이 북한과의 좌우합작을 요구하는 발언을 시작하자, 연설중 즉각 대회장을 박차고 퇴장하였다. 1월 23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입국을 유엔소련대표 그로미코가 거부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1948년 3월 1일 남로당 중앙위원회로부터 "제국주의자의 앞잡이가 되어 조국의 분할 침략계획을 지지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등의 정체를 폭로하고 인민으로부터 고립·매장시키지 않으면 안된다."는 비판을 받았다.[110] 1948년 3월 17일 이승만을 암살하기 위한 암살단이 이승만의 사저로 침투했으나 암살에는 실패했다.[111] 한편 사건 직후 이승만 측에서는 김구도 암살단의 공모자로 지목했다.[111]
3월에는 총선거 연기설이 확산되었는데, 선거 연기설이 나돌자 이승만은 3월 30일 성명을 발표, 선거 연기설을 비난하였다. 4월 1일에는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은 소련의 목적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비판성명을 발표하였다.
5.10 단독 총선거 직후[편집]김구와의 우정에 금이간 후 이화장을 찾아온 비서 박용만과 대화하던 중
김구 주석이 나하고 같이 한 길을 못가게 된 것은 정말 슬픈 일이며, 내 가슴이 쓰라리다. 원통한 일이다. 김주석은 내 아우야! 이 세상에 하나 밖에 없던 내 아우야! 정말 원통한 일이야.내 가슴이 쓰라리고 아파![112]
라며 말끝을 흐리고 눈물을 흘렸다.[112] 박용만에 의하면 흐르는 눈물을 닦으면서 이박사는 무슨 말을 더 하려고 머뭇거렸으나 슬픔이 북받쳐 오르는 바람에 아무 말도 더 못했다고 했다. 이날 흘린 이승만의 눈물은 김구선생과 갈라선 이승만 한 사람의 눈물이 아니라 한국의 앞날을 걱정한 온국민의 눈물이기도 하다고 평가하였다.[112]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의 감정의 골은 깊어졌다. 한독당의 당원이던 김선(1910~)의 회고에 의하면 김구가 남북협상에 다녀온 뒤 '날 보고 하는 얘기가 이승만 박사 욕을 하더라[113]'는 것이었다.
우리가 중국서 뻣뻣한 빵 한 조각으로 며칠씩 끼니 할 때 이승만이 반역자 자금 걷으러 미국 간다 하고선 돈커녕 미국 여자 하나 얻어서 침대서 잠자고 이제 와서 지가 애국자라고 나와?[113]
그러면서 말도 꺼내기 싫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김선에게 '거 뭣하러 가서 만나느냐[113]'고 대응했다. 이승만은 '김구는 혁명가는 될수 있어도 정치가는 못 되고, 그저 곡괭이 들고 나가서 부수라면 하겠지만 정치 다독거리는 건 못해[113]'라며 조롱하였다.
이승만은 이승만 대로 또 하지 미군정청 사령관을 비난했다. 김선에 의하면 '이박사는 밤낮으로 하지 중장을 욕한다.[113]'고 회고했다. 그에 의하면 '자기(하지 중장을 지칭) 집에 가면 행랑살이 밖에 못할 것이 총선 하는거 자꾸 연기하자 그런다고[113]' 하는 것이다.
1948년 5월 10일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 당선되었다.[114]
제헌 국회의장과 헌법 선포
1948년 5월 31일 임시 의장으로 개회사를 낭독하는 이승만 대한민국 제헌국회, 제헌절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48년 5월 31일 구성된 제헌국회는 최고령자였던 이승만을 제1대 제헌국회(制憲國會)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국회의장이 된 이승만은 윤보선을 자신의 국회의장 비서로 채용했다. 그러나 한민당에 의해 내각 책임제가 언급되자, 이승만은 대통령중심제를 고집하며 6월 16일 헌법기초위원회에 참석하여 대통령책임제 의사를 강력히 전달하였다.
7월 12일 이날 기념사를 통해 “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서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온 결실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밝히고 “이 정부가 대한민국의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이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을 선언했다. 또한 건국의 대장전이 되는 제헌헌법은 다음과 같이 그 전문을 선포했다.[115]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해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해 이제 민주독립 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 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 제 제도를 수립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 해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해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이 선거된 대표로서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116]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115]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이후 헌법 제정과 함께 대통령 선거가 준비된다. 1948년 7월 20일 1948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 김구, 안재홍, 서재필 등을 누르고 제헌 국회의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초대 대통령 취임 선서7월 24일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8월 15일 독립기념일을 맞아 중앙청에서 정부수립을 선포하였다.
...(이상 생략)...이날에 동양의 한 고대국인 대한민국 정부가 회복돼서 40여 년을 두고 바라며 꿈꾸며 투쟁해온 결실이 실현되는 것이며...(이하 중략)...이 정부가 대한민국의 처음으로 서서 끝까지 변함없이 민주주의의 모범적 정부임이 세계에 표명되도록 매진할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선포 직전인 8월 11일 파리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의 국제적 승인을 얻기 위해 장면 등을 대표로 지목, 한국대표단을 파견하였다. 이때 장면을 선택한 이유는 영어에 능한 몇안되는 인사임과 동시에 로마 교황청의 지지를 얻으려는 목적에서였다. 5·10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패배한 윤보선(尹潽善)을 특별히 채용하여 국회의장의 비서실장으로 삼기도 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편집]대통령직 수행시 (1948 ~ 1960)[편집] 제1공화국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승만은 1948년 8월 13일부터 1960년 4·19 혁명으로 하야하기 전까지의 시기(제1공화국)의 대통령이었다. 초기에 집권 여당은 없었으나, 1949년 친이승만계 정당 대한국민당 창당 이후 독립촉성중앙회를 중심으로 이승만의 직계 정당인 자유당이 1952년 창당되었다. 그는 반공·반일적 정치성향으로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하자는 의견을 묵살하고, 철저히 반일외교 노선을 지향하였다. 북한의 도발을 우려한 이승만은 대한군원(對韓軍援)과 미군의 계속주둔을 요구했으나 미 국무성은 이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117]
취임 직후
1951년의 이승만 대통령
취임 선서 장면이승만은 1948년 7월 20일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나서 2위 김구, 3위 안재홍을 누르고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48년 7월 24일 당시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던 중앙청 광장 앞에서 취임식을 거행하였다. 이날 부통령도 함께 취임식을 치렀다. 1948년 8월 15일에 정부수립을 선언하였다. 그 직후, 이승만은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정하고, 공식 문서에서 쓰는 달력은 단군기원(4281년)을 사용하도록 했다. 1948년 8월 15일은 단기로 4281년 8월 15일이었다. 8월 26일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원조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승만은 우방과 어떤 형태든 외교관계를 맺어 새로 수립된 정부가 국제적 고립을 면해야 한다는 집념에 사로잡히게 되었고, 이러한 정부승인 외교를 위해 조병옥 · 장면 두 특사를 세계 각국에 파견(1948년 8월)하였다.[118] 9월 30일 대통령 시정방침을 발표하였고, 10월 8일 미국 국무성에 미군철수 연기를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9년의 이승만과 장개석.10월 9일 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민족청년단 창단 2주년 기념식에 참석하여 축사를 낭독하였다. 10월 19일부터 20일까지 주일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의 초청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영부인 및 4명의 수행원(정한경 · 김양천 비서 · 김동성 공보처장 · 이정순 공보국장)이 수행하였다. 1박2일의 비공식적 사교 방문이었으나, 대한민국이 주권을 회복하고 나서, 초대 대통령이 일본 땅을 처음 밟는 것이었다. 주일 미국대사관저에서 더글러스 맥아더와 1차 회담을 가진 이승만은 이날 밤 더글러스 맥아더의 저택으로 초대되어 함께 축배를 들었다. 이 방문은 맥아더의 방한에 대한 답방형식이었으나, 맥아더 장군으로부터 한국 방위에 대한 확실한 지원을 얻어내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119] [120] 11월 6일 여수·순천 사건에 따른 국가위기를 맞아 수습책을 국회에서 발표하였다.
제3차 국제 연합 총회(파리, 1948년 12월)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한국대표단의 노력으로 간신히 대한민국 승인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였다.(12월 12일) 이승만은 재외공관 설치작업을 서둘렀다. 우선, 대미외교에 있어서 이승만은 국제 연합 총회를 마치고 미국을 방문하였다가 귀국을 준비 중이던 장면을 대한민국 정부의 특별대표(Special Representative, 특사)로 임명(12월 27일)하였다. [121]
집권 1기
대통령 취임 초기 (1949년 무렵)
장면, 초대 주미대사로 활동하며 대한민국 정부 승인과 6.25 전쟁 당시 주한미군, UN군의 파병을 이끌어냈다. 이승만은 장면의 실적을 높이 평가해 제2대 총리로 발탁했지만, 그는 원내 자유당 인사들에 의해 내각제 총리와 대통령의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1월 2일 이승만은 장면을 주미대사로 인정해달라는 붓글씨를 친필로 작성해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에게 보냈다.[122]
1949년 1월 6일 민족청년단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그는 족청을 해산하여 대한청년단에 통합하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범석은 족청을 완전히 해산하지 않고 일부 보존하였다. 1월 7일 일본에 대한 배상금을 요구할 것이라고 언급하였으며, 1월 8일 일본에 대마도의 반환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였다. 1월 9일 반민특위의 친일파 처벌에 신중해야 한다고 담화문을 발표했고, 2월 18일 유엔이 북한과 협상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유엔기구가 북한과 협상하는 데 대해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3월 23일 필리핀 퀴리노 대통령이 제안한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안을 지지하였고, 5월 20일 일본에 대한 대일배상요구 관철을 주장하였다. 6월 9일 일본의 어업구역 확대에 반대 성명을 발표하였고, 7월 1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추가 원조를 요청했다. 7월 20일 반공적인 태평양동맹의 체결 협의를 위해 퀴리노 필리핀 대통령,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을 초청하였다. 8월 8일 장제스와 진해에서 회담하고 돌아왔다. 10월 18일 대통령관저 담벼락 근처에 폭발물 장치를 매설한 것을 터지기 전에 경관이 발견하였고, 이승만도 이를 확인하였다. 10월 28일 일본과의 강화조약 체결까지 임시통상협정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언명하였다. 11월 26일 남북통일방안으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해체후의 총선거를 주장하였다. 11월 29일 귀속재산인 일본인 주택을 매매할 것을 발표하였다. 12월 16일에는 군사원조에 비행기 등의 포함을 미국에 요청하였으나 묵살당하였다.
1949년, 미국측에서는 한국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모병제를 권고하고 이에 대한 기반을 다지는 데 전력을 다해 도와주겠다고 권유했으나, 물자원조를 하나라도 더 받아내려는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C레이션 박스 한상자라도 더 원조받기 위해 징병제를 고집하였다.[출처 필요] 이후 한국군은 60년이 넘게 징병제를 고수하게 되었다.
1949년 미군이 철수하자 이승만은 1949년 12월 중순 주미한국대사 장면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서 이승만은 미국의 편향적인 친일정책의 부당성을 지적하면서,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과 일본의 한국 합병에서 보았듯이 일본을 위해 한국을 포기할 수 있음을 주장하며 심각하게 우려를 표했다.[123] 자신의 전기인 우남이승만전에 아버지 이경선에게 공(公)이라는 존칭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여 판매금지조치 시켰다. 그해 6월 부활된 대한적십자사 개소식에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를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1949년 이승만은 기자회견을 통해 무력을 통한 북진통일을 피력하였다.
“ 한국은 한 몸뚱이가 양단된 셈이다. 한국은 앞으로 장기간 남북 분열을 용인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전쟁으로서 이 사태를 해결하여야 할 때는 필요한 모든 전투는 우리가 행할 것이다.……이 대사상 냉정 전쟁(大思想冷靜戰爭)에서 우리는 공산주의를 저지하기 위한 가능한 모든 일을 할 것이다.
-1949년 10월 기자 회견
”
[124]
한편 1949년 서울지방법원의 '처의 관계부존재확인 판결'을 제기하여 양자 이은수를 파양하였다. 한편 그때까지도 일정부분 생활비를 지급하던 전 부인 박씨와는 6.25 전쟁 이후 연락이 끊어지게 된다.
친일파 청산 반대 의혹 반민족행위처벌법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이승만은 오랜 망명생활로 국내 정치기반이 취약하였고, 해방 직후 가졌던 좌익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우익, 친일파를 기반으로 권력을 유지하였다. 귀국 초기 대동단결론을 주장하며 "선통일, 후친일파 청산"을 주장하였으며 권력 유지를 위해 대한민국 수립 후 친일관리를 대거 등용하였다.[125]
반민족행위처벌법은 1948년 9월 22일 법률 제3호로 제정된 법률로 반민족행위자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반민특위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특별담화를 발표하거나 특위 위원들에게 직접 압력을 가하는 등 활동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였다.[126]
“ 정부와 국회의 위신을 보존하여 반민 법안을 단속한 시일 내에 끝마치도록 할 것이다. (중략)....지금 반란 분자와 파괴 분자와 각처에서 살인, 방화를 하며 인명이 위태하고 지하공작이 긴밀한 이때 경관의 기술과 성격이 아니면 사태가 어려울 것인데 기왕에 범죄가 있는 것을 들춰내서 함부로 잡아들이는 것은 치안 확보상 온당치 못한 일이다.
-1949년 2월 2일 특별 담화문 「반민법 실시에 대하여」
”
반민족행위 처벌법안이 발의되자 친일파들은 국회와 서울 시내에 협박장을 뿌렸다. 내용은 "민족 처벌을 주장하는 놈은 공산당의 주구다."라는 것이었다. 이승만도 이에 동조하여 "친일파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한 것은 공산당이다."라고 말했다. [127]
결국 반민특위는 국회 프락치 사건과 6.6 특경대 습격사건 등이 결정타가 되어 해산하고 만다. 각 사건은 당시 내무차관 장경근의 지시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특경대 해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이승만이었다.[128]
“ 내가 특별경찰대를 해산시키라고 경찰에게 명령한 것이다... (중략)... 특별 경찰대는 국립 경찰의 노련한 경찰관이자 반공투사 최운하 등을 체포하였는데....(중략)..현재, 특위에 의한 체포의 위협은 국립 경찰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49년 6월 8일 AP통신사와의 회견中.
”
이때문에 반민특위 특경대는 '친일파들과 결탁한 이승만 정권의 탄압'[129] 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친일파 포용은 민족문화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남게 되었다.[125] 하지만, 북한 측의 초기 정부 구성원을 살펴보면, 대한민국 정부에 비해 더 많은 친일 인사들을 기용하고 있음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의 북한과 한국 내의 일부 좌익 인사들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문제 삼는 것이 비해, 북한의 정통성은 더욱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내각 인선 작업[편집]초대 내각의 대부분은 독립운동가 출신자로 기용되었다.[130] 제1공화국 연인원 96명의 각료 가운데 30자리 이상을 구연수 등 친일파 또는 친일파 후손에게 주었다는 견해가 있다.[131]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협조하는 대신 그는 한민당에게 총리직과 내각 각료직의 일부를 약속했다. 그러나 한민당의 세력이 강해지자 경계한 이승만은 총리직을 한민당에 안배하지 않기로 생각을 바꾼다. 당시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는 인사로는 김성수, 조소앙, 이윤영, 이범석 등이 있었다.
1948년 7월 22일 초대 총리를 한민당이 아닌 조선민주당의 당수 이윤영(李允榮)을 천거하자 한민당은 집단으로 반대하여 총리서리 인준을 부결시켰다. 7월 29일 이범석을 서리로 천거하자 반대할 명분이 없었던 한민당은 이범석을 인준하였다.[132] 이윤영의 총리인준이 실패하자 그는 이윤영을 지청천과 함께 초대 내각의 무임소 장관으로 임명하여 입각시킨다.
내각 인선시 그는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발탁하기도 했다. 조선공산당 출신 전향자였던 조봉암의 발탁은 파격인사였으며, 이후 이승만은 조봉암 등을 통해 농지개혁을 추진하기도 한다. 토지개혁을 통해 그는 한민당과 토착 지주세력의 기반인 농지를 실제 농민에게 분배하여 한민당과 지주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상공부 장관에는 그의 측근이었던 임영신이 발탁되었는데,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장관이다.
정부수립 직전, 한민당에게는 내각 장관직의 절반 또는 총리직을 주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재무부 장관 1석만을 부여하였다. 단독정부 수립에 협조하였음에도 이승만이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한민당은 이번 내각은 실패한 내각이라며 즉각 반발하고 야당화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국회 내의 한민당의 영향력, 4.3 사건, 여순 반란 사건 등의 후유증이 나타나자 이승만도 한발 물러서, 2대 내각에는 한민당이 당명을 바꿔 만든 민국당계 인사들을 대거 입각시킨다.
대일외교 문제와 이승만 라인
이승만의 독도 라인과 대마도 영유권 주장에 항의하는 일본인들의 집회 이 부분의 본문은 이승만 라인입니다.
1951년 미국의 권고로 한·일관계 정상화 교섭은 남북 휴전 회담이 개시된 직후인 1951년 10월에 미국의 주선 으로 예비 회담 이 있었다 . 그러나, 엣날 일본으로부터 고문 받은 경험이 있는 이승만 은 식민지 지배 에 대 한 명확한 사죄로 70억 달러의 배상을 요구했다.[133] 일본측은 제의를 거절했고, 협상은 결렬되었다.
취임 이후 그는 독도 문제로 일본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1945년 9월 27일 미국이 일본어업의 조업구역으로 설정한 '맥아더 라인'이 1952년 무효화되면서 이승만은 이를 대체할 법안으로 당시 한국과 일본과의 어업분쟁에서 대한민국의 주장에 의한 방위 수역을 설정했다. 이어 1952년 10월 14일 대통령 긴급명령 제12호로 '포획심판령'을 제정 공포하고 포획심판소및 고등포획심판소를 개설 하였으며 1953년 해양경찰대 설치계획을 수립하고 이해말에 180톤급 경비정 6척으로 부산에서 한국해양경찰대를 창설하여 평화선을 침범하는 외국선박과 밀무역을 단속하도록 하였다.
1952년 1월 18일 이승만은 동해에 평화선을 선포하였고[134], 세계를 놀라게 했다. 2월 12일 미국은 이승만의 평화선을 인정할 수 없다고 이승만에게 통보해왔으나[134] 그는 이를 묵살하였다.
1952년 2월 4일에는 일본 어선이 제주도 남쪽 바다를 침범, 이를 나포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찰이 총을 쏘아 일본선박의 선장이 사망했다. 이후 한국 영해를 넘나드는 일본 선박에 대해서는 체포, 억류 등의 강경대응을 하여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로 평화선이 새로운 한일어업협정으로 대체되기 전까지 한국 해경은 328척의 일본 배와 3929명의 선원들을 나포, 억류하였으며[135] 나포한 일본 배를 해양경비대의 경비정으로 쓰게 하기도 했다.[135]
중국측의 영해침략에 대해서도 강경대응을 하였다. 1955년 12월 25일엔 해양경찰대 866정이 흑산도 서남방 근해의 평화선을 침범한 중국 어선 15척을 나포하려다가 총격전이 벌어졌다.[135] 한국 경찰관 네 명이 중국 배에 납치되어 가서 12년 5개월간 옥살이를 해야 했으며 1960년 1월10일엔 해양경찰대 701정이 서해 서청도 부근에서 중국 어선단을 검문 중 총격을 받고 두 사람이 사망하고 세 명이 부상당하기도 했다.[135]
한국 전쟁 (1950 ~ 1952)
1951년의 이승만 대통령
한국 전쟁 중 이승만 대통령과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그러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대전에서 사흘을 머무른 뒤, 7월 1일 새벽에 열차편으로 대전을 떠나 익산(이리)에 도착하였다. 7월 2일에는 다시 목포에 도착하였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옮긴 뒤 7월 9일 대구로 옮겨갔다. 그러나 전황을 전혀 모르던 국민들은 북한군이 서울 미아리 고개까지 쳐들어 오자 그 때서야 피난을 시작했다. 그러자 정부는 북한군이 한강을 넘어서 진격할 것을 우려해 한강철교를 예고없이 폭파해 무고한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철교 폭파는 신성모 국방장관이 지시했지만, 총리 이범석이 건의하였다는 주장도 있다.[136] 북한군을 곧 격퇴할테니 피난가지 말고 안심하라는 이승만의 라디오 방송을 믿었던 상당수의 서울시민들은 한강 철교의 폭파로 발이 묶였고 조선인민군은 곧 서울을 넘어 대구, 부산, 포항 일대를 제외한 모든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다. 안심하라는 라디오 방송 당시 이승만은 대전에 피신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피난가지 못한 수많은 서울시민들은 북한군에 의해 강제동원되었는데, 전쟁 후에는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사실에 의해 유무형의 피해를 입게되었다.
이 무렵에 '대국민 사상통제 목적'으로 조직된 반공단체 국민보도연맹에 가입된 사람들이 조선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에서 부역행위 등 협조할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그래서 이승만은 김창룡의 CIC 특무 헌병대에 지시하여 '인민군 점령 수중에 들어가지 않은 지역'의 보도연맹원들을 잡아 처형하도록 명령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했다. 이를 보도연맹사건이라 한다. 당시 보도연맹에 가입자들 가운데 실제 공산주의자 외에도 공무원들의 실적을 위해 문서에 기록되거나 배급 수령을 위해 가입한 양민들도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보도연맹원 처형자들의 유해나 유적 발굴조사는 계속 진행 중이다.
한때 이승만은 일본 야마구치 현에 망명정부를 설치하는 방안도 세우고 있었다.[137] 정권 관리들은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망명정부 수립의사를 일본에 전달했으며, 일본 정부는 야마구치현 지사 다나카에게 6만여명을 수용할 시설 및 식량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당시 다나카 지사는 현의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과 일본 정부에 특별 식량배급요청 여부를 검토하기도 했다.[137] 1950년 6월27일 이승만은 대통령과 내각으로 구성된 망명정부를 일본에 수립하는 방안을 주한미대사에게 문의해왔고 이는 그대로 미 국무성에 보고되었다.[137]
한국전쟁 휴전 후 국회의장 신익희, 국회부의장 장택상, 조봉암은 이승만을 찾아가 '수도 서울을 지키겠다고 약속해놓고 약속을 위반하고 도주한 것에 대한 대국민사과를 발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이승만은 내가 당 덕종이냐면서 거절했다. 조봉암이 끝까지 이승만의 사과를 요구하자, 이승만은 제스처를 하며 '다 과인이 부덕한 탓이오 이럴까?'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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