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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北 역대 최고위 망명자 김국성: “2013년 장성택 처형에 한국행 결심”
30년 경력의 김국성은 북한의 강력한 첩보국의 최고위로 부상했다. Image caption 글: 로라 비커
BBC 원문 2021.10.11. [시사뷰타임즈] 비밀을 엄수하는 오래된 습관은 김국성을 떠나지 않았다. 그와 취재대담을 하겠다고 논의하는데 만도 여러 주가 걸렸으며 그는 여잔히 누가 경청해 줄 것인가에 대해 우려한다. 그는 사진기에 대비해 어두운 안경을 착용했고, 우리 취재진 중 2명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그의 진짜 이름이다. 김국성은 북한의 강력한 첩보 기관들로 올라가려고 노력하는데에만 30년을 보냈다. 이 기관들은 “최고지도자의 눈, 귀, 그리고 두뇌” 라고 그는 말한다. 그는 자신이 그 기관들의 비밀을 지켰고, 암살범들을 보내 자신들을 비평하는 자들을 살해했으며, 불법 마약 연구소를 지어 “혁명 관련” 기금 모음을 돕기까지 했다고 주장한다. 이제, 전 고위 대령은 BBC에 자신의 이야기를 말해 주기로 작정했다. 이 정도의 평양 출신 고위 군관계가 주요 방송국에 취재대담을 허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김은 이 단독 취재대담 중에 “빨갱이 중에서도 가장 빨갱이” 였다고 말한다. 충성스런 공산주의자 공복. 그러나 서열과 충성심이 북한에서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못한다. 2014년 그는 자신의 목숨을 위해 도망쳐야만 했고, 그 이후고 그는 서울에서 살고 있으며 한국 정보부를 위해 일하고 있다. 그는 북한 지도부가 마약 거래에서부터 중동 및 아프리카에의 무기 판매에 이르기까지 가능한 그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현금을 벌어들이기 위해 결사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는 우리 취재진에 평양에서 이런 결정을 하게된 배후 전략에 대해 말해 주었는데, 이 정권의 한국에 대한 공격이 그것이고, 이 은밀한 나라의 간첩과 사이버 망은 세계 여러 곳에 뻥어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BBC는 독자적으로 그가 주장하는 내용들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가까스로 그가 하는 말들을 확증해줄 곳을 찾았다. 우린 런던 주재 북한 대사관 및 뉴욕 주재 사절단에 성명을 부탁했지만 지금까지 회신을 전혀 받지 못했다. ‘테러 책무군’ 북한 고위 정보부대에 있는 지난 몇 년은 현재의 지도자의 초기 경력에 대해 어느 정도 통찰력을 제공한다. 그는 한 젊은이가 자신을 “전사” 라고 열렬히 입증하고자 하는 그림을 그린다. 북한은 2009년에 정찰총국 (RGB) 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첩보기관을 결성했는데, 김정은이 중풍 (뇌졸중) 으로 고통을 받아왔던 자신의 아버지를 계승하기 위해 막 단장을 하고 있는 중이었을 때였다. 이 첩보국의 수뇌는 김영철이었는데, 북한 지도자가 가징 신뢰하는 보좌관들 중 하나로 남아있다. 김국성은 2009년5월, 서울로 망명한 전 북한 관계자들을 살해할 “테러 책무군”을 결성하라는 명령이 하달됐다고 했다. “김정은으로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최고지도자 (김정은) 을 만족시키는 행동이었다.” 고 김은 말한다., “‘책무군’ 이 비밀리에 황장엽을 암살하기 위해 결성됐다. 난 개인적으로 지시하며 그 일을 수행했다.” 황장엽은 한때 북한의 가장 중요한 관계자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북한 정책 핵심 설계자 이어왔었다. 1997년 그의 서울로의 망명은 결코 용서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때 서울에서, 황장엽은 북한 정권에 대해 극도로 비평적이었고, 김씨 가족은 복수를 원했다. 그러나 암살 시도는 실패했다. 북한의 육군 소령 2명은 이 음모 때문에 서울에서 아직도 10년 징역을 살고 있는 중이다. 평양은 항상 자국이 연루돼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한국이 벌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김국성의 증언은 그와는 다른 내용을 시사한다. “븍힌에서, 테러주의는 북한 최고 존엄인 김정일과 김정은을 보호하는 정치적 수단이다.” 라고 그는 말하면서 “계승자가 자신보다 한 단계 위의 지도자에게 충성심을 보이는 것은 선물이었다.” 고 했다. 향후 일어날 일이 더 많았다. 1년 뒤인 2010년, 한국의 해군 함정인 천안함이 어뢰 공격을 받고 침몰했다. 46명이 목숨을 잃었다. 평양은 항상 자국의 연루를 부정해 왔다. 그뒤, 같은 해 11월, 북한의 수십 게 포대가 한국의 섬인 연평도를 공격했다. 병사 2명과 민간인 2명이 살해됐다. 이 공격 명령을 누가 내렸는지에 대해 논의가 많아왔다. 김국성은 자신은 “천안함 및 연평도 작전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았었다.” 고 했지만, 그 사건들은 “RGB 담당관들에겐 비밀이 어니었고, 자부심을 느끼고 과시할 만한 것이었다.” 고 했다. 김국성은 “그 두 작전은 가장 꼭대기의 명령이 없이는 벌어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북한에선, 하다 못해 도로 하나를 건설하는 것도 최고 지도자의 직접적 승인이 없으면 할 수가 없다. 천안함 침몰과 연평도 폭격은 하급자들이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류의 군사작전은 김정은의 특별 명령으로 설계되고 이행된 것이다. 하나의 성과물이다.” ‘청와대 속의 첩자’ 김은 북한에서 자신이 책임지고 있었던 것들 중 하나는 한국을 다룰 전략을 개발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목표는 “한국을 북한에 정치적으로 종속시키는 것” 이었다. 그러한 일은 현장의 눈과 귀를 갖는 것과 관련된 것이다. 김은 “간첩들을 한국으로 가라고 하여 간첩들을 통해 작전적 임무를 수행토록 지시했던 사례는 많다.” 고 그는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말을 공들여 꾸미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흥미있는 사례를 제공한다. “북한 요원 한 명이 배치되어 한국 청와애에서 일한 사례가 있었다. 1990년대 초였다. 5년 동안 청와애에서 일을 한 뒤, 그는 안전하게 돌아와서 노동당의 314 연락사무소에서 일했다.” “닌 여러분들에게 북한 정보원들이 한국의 여러 기관에선 물롱니고 시민 사화ㅣ 여러 다양한 조직들 속에서도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말해 줄 수 있다.” BBC는 이러한 주장을 확인할 길이 없다. 난 한국에서 북한 간첩으로 유죄 선고를 받은 몇 명을 만나왔고, NK 뉴스 설립자 차드 오캐럴이 최근 기사에서 언급한 바 대로, 한국 감옥들은 한 때 수십년 동안 다양한 형태의 간첩질로 체포된 북한 간첩 수십명으로 채워져 잇었다. 몇 안 되는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 왔는데 그중 최소 한 가지는 북한에서 직접 보낸 간첩과 관련돼 있었다. 그러나 NK 뉴스 자료들은 2017년 이후로 한국에서 간첩 관련 범죄로 체포된 사람은 훨씬 더 적다는 것을 시사하는데, 이는 북한이 구닥다리 간첩 보다는 정보 수집을 위해 새로운 기술 쪽으로 고개를 돌렸기 때문이다. 북한은 세계에서 가장 빈곤하고 가장 고립된 나라들 중 하나일 수 있지만. 종전의 고위 북한 망명자들은 평양이 숙달된 6,000명으로 구성돼 있는 해커군을 새로 만들어 놓았다고 경고해 왔다. 김국성에 따르면, 종전의 북한 지도자 김정은이 “사이버 전투 대비를 위해 새로운 요원을 훈련시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는 “모란봉 대학교는 전국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들을 뽑아서 6년간 특별 교육을 받는 곳에 넣었다.” 고 말한다. 영국의 보안 관계자들은 라자루스 집단이라고 알려진 북한의 정찰총국이 NHS (의료보험) 및 기타 세계 여러 곳의 조직들을 불구로 만들었건 사이버 공격의 베루였다고 믿는다. 이 정찰총국이 2014년 시선을 사로 잡은 해킹 사건에서 소니 영화사를 표적으로 삼았다고 여겨진다. 김은 정찰총국 사무실은 414 연락사무실이라고 알려져 있다고 말한다. “내부적으로, 우린 그곳을 ”김정일의 정보 본부“ 라고 명명했다.” 그는 정찰총국ㄹ은 북한 지도자와 직통 선화선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요원들이 중국, 라셔 (러시아), 그리고 동남아 국가들에도 있다고 말하지만, 이들은 북한 자체에서도 작전을 벌인다. 이곳은 또한 북한 간첩요원들 사이의 통신을 지킨다.” “달러벌이용 마약‘ 최근, 김정은은 자국이 다시 한 번 위기에 “봉착해 있다” 고 하면서 북한 인민들에게 또 한 번의 “고난의 행군” 준비를 하라고 요구했는데, 이 구절은 김정일 치하였던 1990년대의 처참한 기근에서 나온 말이다. 그 당시, 김국성은 작선부처에 있었으며 최고지도자를 위해 “혁명적으로 기금을” 모금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그 지시는 불법 마약 거래를 뜻하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김정일 북한에서의 마약 생산은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최고조였다.” 고 그는 말하면서 “그 당시, 작전 부처는 최고 지도자를 위한 혁명적 기금이 다 떨여져 있었다.” 고 했다. “그러한 책무를 할당 받은 뒤, 난 노동당 715 연락 사무소 훈련 본부에 있는 생산기지를 외국인 세 명을 해외에서 데리고 들어와 지었고 마약을 생산했다.” “그것이 ICE (메써페터민; methamphetamine; 각성제의 일종) 였다. 그후 우린 이 마약을 달러로 현금화 하여 김정일에게 주었다.” 그 당시 그의 마약 거래 계정은 그럴 듯하다. 북한은 마약제조의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데, 대개가 헤로인과 아편이다. 전 주영 북한 외교관 태영호도 서울로 망명한 사람으로서 오슬로 자유 공개토론에 2019년 북한은 국가가 후원하는 마약 밀매에 관여하고 있으며 널리 퍼져있는 북한 내 마약 중독 병을 치료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고 한 바 있었다. 난 김씨에게 마약을 판 돈이 어니로 가느야고 물었다. 그 돈이 인민들을 위한 돈으로 바뀌었던 것일까?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하자면, 북한에 있는 모든 돈은 북한 지도자의 것이다.” 라고 그는 말하면서 “그 돈으로, 북한 지도자는 별장들을 짓고, 승용차를 구입하고, 식품을 구입하며, 옷을 사고 또 사치품을 즐긴다.” 고 했다. 1990년대에 북한의 오래 끌어온 먹거리 부족사태로 죽은 사람 추산치는 수십만 명에서 1백만 명에 이른다. 김씨에 따르면, 또 다른 수입원은 작전 부처가 관리하는 이란에의 불법 무기 거래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는 “특수 소형 잠수함, 반 잠수정이 있었다. 북한은 이와 같은 최신예 장비 건조에 아주 능숙하다.” 고 그는 말한다. 그의 이러한 말은 북한 잠수함이 소음이 심하고 경유 엔진이다 보니 북한 정치 체제를 좀 선전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김은 거래는 아주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이란에 나가있는 부부장은 이 사업을 위해 이란 인들을 자신의 수영장으로 불러들였다고 으스대곤 했다고 주장한다. 북한에 대한 세계의 유력한 권위자들 중 한 명인 안드레이 란코프 교수에 따르면, 북한의 이란과의 무기류 거래는 1980년대 이후로 공개된 비밀이어 왔고 탄도 미사일류도 포함돼 있다고 한다. 북한은, 엄격한 국제적 제재 대상임에도 불구, 대량살상무기 개발을 계속 앞닥겨 왔다. 9월, 이 나라는 새로운 장거리 순항 미사일, 탄도 미사일 철로 발사 체제, 초음속 미사일, 그리고 대-항공기 미사일 등을 포함한 네 가지 새로운 무기 체제를 실험했다. 기숭은 이제까지보다 더욱 세련되게 증가하고 있는 중이다. 김씨에 따르면, 평양은 내전을 오래 하고 있는 여러 나라들에게 무기류와 기술도 판매했다고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유엔은 북한이 시리아, 미얀마, 리비아 그리고 수단에 무기를 공급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유엔은 평양에서 개발된 무기들이 결국 세게 많은 문제있는 곳들로 갈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충성스런 공복의 배반’ 김씨는 북한에서 특권 층 삶을 살았다. 그는 김정은 숙모에게서 머시더스-벤츠 승용차를 타보라고 받았으며 북한 지도자를 위해 해외에서 자유롭게 돈을 모급 하며 돌아다니라고 허락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현금으로 수백만 달러를 모금하기 위해 희귀한 금속류 및 석탄을 팔았으며, 판매금은 옷가방에 넣어 북한으로 들어갔다고 말한다. 인민 수백만 명이 식량 부족으로 몸부림을 치고 있는 빈곤한 나라에서, 그의 생활은 살아가는 것은 둘째 치고라도, 그러한 생활은 극소수나 상상할 수 있는 삶이다. 김씨의 강력한 정치적 연결성은 결혼을 통해 다른 정보기관 사이를 이동하게 해 준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연결 상태가 그와 그의 가족을 위헙에 빠뜨리기도 했다. 2011년 정치적 권좌로 상승한지 얼마 안돼, 김정은은 자신의 고모부인 장성택을 비롯하여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숙청하겠다고 결심했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건강이 약해지면서, 북한의 사실상 지도자였다는 의견들이 오래도록 있어왔다. 김씨에 따르면, 장성택의 이름이 김정은 보다 더욱 널리 퍼져있게 됐었다고 한다. “그것이 내가 장성택이 오래 갈 수가 없으리라고 느꼈던 때이다. 난 그가 시골 지역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느꼈다.” 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그후 북한 국영언론은 2013년12월, 장성택이 처형됐다고 공표했다. “난 놀란 것 그 이상이었고, 그건 치명적인 한 방이었기에 난 간담이 서늘해졌다.” 고 말하면서 “난 나의 삶에 즉각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난 내가 북한에서 더 이상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고 했다. 신문에서 장성택 처형 소식을 읽었을 때 그는 해외에 있었다. 그는 가족과 함께 한국으로 도망갈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맘 먹었다. “내 선조들의 무덤 및 가족이 있는 조국을 버리는 것, 그리고 그 당시 외국 땅이었언 한국으로 도피한다는 것은 감정적 고통이 따르는 최악의 비탄에 젖은 결정이었다.” 고 그는 말한다. 그의 어두운 안경 뒤에서 조차도, 난 그 기억이 그에게 힘든 것임을 볼 수 있었다. 많은 시간에 걸쳐 많이 만나는 동안 내가 계속 물었던 한 가지 질문은, 이제와서 말하겠다고 작정한 이유가 뭐냐는 것이었다.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의무다” 라고 그는 말하면서 “난 내 북쪽의 형제들을 독재자의 손아귀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그리고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즐길 수 있도록 지금부터 쭈욱 더욱 자유롭게 활동적이 될 것이다.” 라고 했다. 한국에는 망명자가 3만 명 이상 있다. 그중 극소수만이 언론에 말을 하기로 결심한다. 더욱 유명한 인물일수록 그와 그의 가족에게 더욱 큰 위험이 따른다. 한국에는 망명자들의 설명하는 그들의 삶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결국, 어느 누구라도 어떻게 진정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 김씨는 대단히 비통상적인 삶을 살았다. 그의 설명은 북한 전체가 아니라 북한 일부의 이야기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정권 내부의 모습을 제공해 주며, 우리들에게 이 정권에서 살아남으려면 무엇이 필요한 지에 대해 말해 준다. 그는 “북한의 정치 사회에선, 사람들의 판단, 그들의 사고 과정 등은 모두 최고지도자에게 궁극적으로 복종하겠다는 신념을 따른다.” 고 그는 말한다. 여러 세대에 걸쳐 이러한 풍토가 “충성심” 을 생산한다. 이번 취재대담의 시기도 역시 흥미롭다. 김정은은 만일 모종의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가까운 미래에 기꺼이 한국에 말을 걸 수도 있다고 시사했다. 그러나 이런 말에도, 김씨는 역시 경종을 울린다. “내가 한국에 온지 몇 년 됐지만, 북한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고 그는 말한다. “우리가 설정해 놓은 전략은 계속된다. 여러분들이 알 필요가 있는 것은 북한은 0.01%도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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