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1393-1897),대한국 도읍 명칭은 한성(漢城)이며 한양은 고려국 지명이다


조선국(1393-1897),대한국 도읍 명칭은 한성(漢城)이며 한양은 고려국 지명이다

 

 



 1395년 6 한성(漢城) 개칭 이후 한성(漢城),경복궁,태묘,사직단  낙성(落成)    

 

1395년 6월 6일 고려국 한양을 한성(漢城)으로,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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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 7월 17일 송도(松都:개성)에서 고려국 35대 국왕에 즉위한 이성계(李成桂:고려시대의 휘)는 1393년 2월 15일 조선국(1393-1897)을 건국한  후 휘를 이단(李旦)으로 고쳤다. 1394년 8월 11일 고려국 도읍인 송도(松都:개성)의 태조(1393년 2월 15일 조선국 건국한 이단(李旦))가 무악(毋岳)에 이르러서 조선국 도읍을 정할 땅을 물색하는데판서운관사 윤신달(尹莘達)과 서운 부정 유한우(劉旱雨등이 태조 앞에 나와서 말하기를 “지리의 법으로 보면 여기 무악(毋岳)은 도읍이 될 수 없습니다.”하니 이에 태조가 말하기를 “너희들이 함부로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데여기가 만일 좋지 못한 점이 있으면 문서에 있는 것을 가지고 말해 보아라.” 하니 윤신달 등이 물러가서 서로 의논하였는데태조가 유한우를 불러서 묻기를 이 무악(毋岳)이 끝내 좋지 못하냐?” 하니 유한우가 대답하기를신이 보는 바로는 실로 좋지 못합니다.”하니 태조가 또 말하기를 “여기가 좋지 못하면 어디가 좋으냐?”하니 유한우가 대답하기를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태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네가 서운관이 되어서 모른다고 하니누구를 속이려는 것인가송도(松都)의 지기(地氣)가 쇠하였다는 말을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하니 유한우가 대답하기를 “이 것은 도참(圖讖)으로 말한 바이며신은 단지 지리만 배워서 도참은 모릅니다.” 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옛 사람의 도참도 역시 지리로 인해서 말한 것이지어찌 터무니없이 근거 없는 말을 했겠느냐그러면 너의 마음에 쓸만한 곳을 말해 보아라.”하였다.

 

유한우가 대답하기를 “고려국 태조 왕건이 송산(松山명당(明堂)에 터를 잡아 궁궐을 지었는데중엽 이후에 오랫동안 명당을 폐지하고 임금들이 여러 번 이궁(離宮)으로 옮겼습니다신의 생각으로는 명당의 지덕(地德)이 아직 쇠하지 않은 듯하니다시 궁궐을 지어서 그대로 개성인 송경(松京)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을까 합니다.”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내가 장차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했는데만약 가까운 지경에 다시 길지(吉地)가 없다면 고례백제신라인 3한국시대의 도읍도 또한 길지가 됨직하니 합의해서 알리라.”하였다태조가 좌시중 조준(趙浚우시중 김사형(金士衡)에게 이르기를 “서운관이 고려 말기에 송도의 지덕이 이미 쇠했다 하고 여러 번 상서하여 고려국 지명 한양(漢陽)으로 도읍을 옮기자고 하였었다근래에는 계룡산이 도읍할 만한 땅이라고 하므로 민중을 동원하여 공사를 일으키고 백성들을 괴롭혔는데이제 또 여기 무악(毋岳)이 도읍할 만한 곳이라 하여 와서 보니 유한우 등의 말이 좋지 못하다 하고도리어 송도 명당이 좋다고 하면서 서로 논쟁을 하여 국가를 속이니이 것은 일찍이 징계하지 않은 까닭이다경 등이 서운관 관리로 하여금 각각 도읍될 만한 곳을 말해서 알리게 하라.”하니 이에 겸판서운관사 최융(崔融)과 윤신달·유한우 등이 상서하기를 “우리나라 내에서는 개성인 부소(扶蘇명당이 첫째요한성인 남경(南京)이 다음입니다.”하니 이 날 저녁에 태조가 무악 밑에서 유숙하는 차()하였다.

 

8월 12일 태조가 여러 재상들의 제시한 의논이 대개 천도(遷都)를 옳지 않다고 한 까닭에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기를 “내가 송도로 돌아가 소격전(昭格殿)에서 의심을 해결하리라.”하고 이에 남경으로 행차하였다. 8월 13일 태조가 남경의 옛 궁궐터에 집터를 살피었는데산세를 관망(觀望)하다가 윤신달 등에게 묻기를 “여기가 어떠냐?”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 경내에서는 송경(松京)이 제일 좋고 여기가 다음가나 한되는 바는 북쪽인 건방(乾方)이 낮아서 물과 샘물이 마른 것뿐입니다.”하니 태조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송경(松京)은 어찌 부족한 점이 없겠는가이제 이 곳의 형세를 보니왕도가 될 만한 곳이다더욱이 조운하는 배가 통하고 4방의 이수도 고르니 백성들에게도 편리할 것이다.”하였다. 태조가 또 왕사(王師자초(自超)에게 묻기를 “어떠한가?” 하니 자초가 대답하기를 “여기는 4면이 높고 수려(秀麗)하며 중앙이 평평하니성을 쌓아 도읍을 정할 만합니다그러나 여러 사람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하소서.”하니 태조가 여러 재상들에게 분부하여 의논하게 하니모두 말하기를 “꼭 도읍을 옮기려면 이 곳이 좋습니다.”하니  하윤이 홀로 말하기를 “산세는 비록 볼 만한 것 같으나지리의 술법으로 말하면 좋지 못합니다.”하였다. 태조가 여러 사람의 말로써 한양(漢陽)신도(新都)로 결정하였다그런데 전 전서 양원식(楊元植)이 나와서 말하기를 신이 가지고 있던 비결은 앞서 이미 명령을 받아서 올렸거니와 적성(積城광실원(廣實院동쪽에 산이 있어 거기에 사는 사람들에게 물으니 계족산(雞足山)이라 하는데 그 곳을 보니 비결에 쓰여 있는 것과 근사합니다.” 하니 이에 태조가 말하기를 “조운할 배가 통할 수 없는데어찌 도읍 터가 되겠는가?”하니 양원식이 대답하기를 “임진강에서 장단 까지는 물이 깊어서 배가 다닐 수 있습니다.”하니 태조가 그만 연()을 타고 태묘 지을 터를 보고서 노원역(盧原驛들판에 이르러 유숙하는 차()하였다.

 

8월 24일 도평의사사에서 태조에게 상신(上申)하기를 “좌정승 조준·우정승 김사형 등은 생각하건대 옛 날부터 임금이 천명을 받고 일어나면 도읍을 정하여 백성을 안주시키지 않음이 없었습니다그러므로 요()는 평양(平陽)에 도읍하고하국(夏國)은 안읍(安邑)에 도읍하였으며상국(商國)은()주국(周國)은 풍호(豊鎬)한국(漢國)은 함양(咸陽)당국은 장안(長安)에 도읍하였는데혹은 처음 일어난 땅에 정하기도 하고혹은 지세(地勢)의 편리한 곳을 골랐으나모두 근본되는 곳을 소중히 여기고 사방을 지정하려는 것이 아님이 없었습니다우리 나라는 단군 이래로 혹은 합하고 혹은 나누어져서 각각 도읍을 정했으나고려국 왕씨가 통일한 이후 송악에 도읍을 정하고자손이 서로 계승해 온 지 거의 5백 년에 천운이 끝이 나서 자연히 망하게 되었습니다삼가 생각하옵건대전하께서는 큰 덕과 신성한 공으로 천명을 받아 한 나라를 차지하시어 이미 또 제도를 고쳐서 만대의 국통(國統)을 세웠으니마땅히 도읍을 정하여 만세의 기초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그윽이 한양을 보건대 안팎 산수의 형세가 훌륭한 것은 옛 날부터 이름난 것이요, 4방으로 통하는 도로의 거리가 고르며 배와 수레도 통할 수 있으니여기에 영구히 도읍을 정하는 것이 하늘과 백성의 뜻에 맞을까 합니다.”하니 태조가 왕지(王旨)로 아뢴 대로 하도록 명하였다.

 

9월 9일 판문하부사 권중화(權仲和3사사 정도전·청성 백 심덕부·참찬 문하부사 김주·좌복야 남은·중추원 학사 이직 등을 한양에 보내서 태묘·사직·궁궐·시장·도로의 터를 정하게 하였다권중화 등은 고려 숙왕(肅王시대에 경영했던 궁궐 옛 터가 너무 좁다 하고다시 그 남쪽에 해방(亥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壬座丙向)이 평탄하고 넓으며여러 산맥이 굽어 들어와서 지세가 좋으므로 여기를 궁궐터로 정하고또 그 동편 2리쯤 되는 곳에 감방(坎方)의 산을 주맥으로 하고 임좌병향에 태묘의 터를 정하고서 도면을 그려서 바치었다. 9월 23일 판3사사 정도전 등은 한양으로부터 돌아왔으나청성 백(靑城 伯심덕부(沈德符)와 참찬문하부사 김주(金湊)는 남아서 궁궐과 기타 도시의 경영을 관리하였다. 10월 25일 태조가 한양으로 이어하였다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경(松京)에 머물러 있게 하고문하 시랑찬성사 최영지(崔永沚)와 상의문하부사 우인열(禹仁烈등으로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를 삼았다. 10월 28일 태조가 신도(新都)에 이르러 옛 한양부의 객사(客舍)를 이궁(離宮)으로 삼았다.이궁(離宮)에서 조선국 왕도의 공사를 추진하였다.

 

11월 3일 도평의사사에서 장신(狀申)하기를 “태묘는 조종(祖宗)을 봉안하여 효성과 공경을 높이는 것이요궁궐은 국가의 존엄성을 보이고 정령(政令)을 내는 것이며 성곽(城郭)은 안팎을 엄하게 하고 나라를 굳게 지키려는 것으로이 세 가지는 모두 나라를 가진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입니다삼가 바라옵건대전하께서는 천명(天命)을 받아 국통(國統)을 개시하고 여론을 따라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였으니만세에 한없는 왕업의 기초는 실로 여기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그러나 아직 태묘를 세우지 못하고 궁궐을 짓지 못했으며 성곽도 쌓지 못하였으니이 것은 도읍을 존중하고 나라의 근본을 무겁게 한 것이 아니라 하겠습니다전하께서 비록 백성들을 소중히 여기고 공사를 일으키려고 하지 않으나이 세 가지는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담당한 관청에 명령하여 공사를 독촉하여서 태묘와 궁궐을 짓고 성곽을 쌓아서 효성과 공경을 조종에게 바치고신하와 백성들에게 존엄성을 보이며또 국가의 세력을 길이 굳건하도록 해야 한 나라의 규모가 짜여지고 만세에 길이 전할 계책이 서게 될 것입니다삼가 아뢰옵건대전하께서는 이를 행하시도록 하소서.”하니 태조가 그대로 따랐다.

 

12월 3일 태조가 하루밤을 재계(齋戒)하고3사사 정도전에게 명하여 황천(皇天)과 후토(后土)의 신()에게 제사를 올려 왕도의 공사를 시작하는 사유를 고하게 하였는데그 고유문(告由文)에 “조선 국왕 신(태조의 휘인 이단(李旦)은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 및 판3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서 한마음으로 재계와 목욕을 하고감히 밝게 황천 후토에 고하나이다엎드려 아뢰건대하늘이 덮어 주고 땅이 실어 주어 만물이 생성(生成)하고옛 것을 개혁하고 새 것을 이루어서 사방의 도회(都會)를 만드는 것입니다그윽이 생각하니 (이단은 외람되게도 어리석고 못난 자질로서 음즐(陰騭)의 기쁨을 얻어 고려가 장차 망하는 때를 당하여 1393년 2월 15일 조선(朝鮮유신(維新)의 명을 받은 것입니다돌아보건대 너무나 무거운 임무를 짊어지게 되어 항상 두려운 마음을 품고 편히 지내지 못하고영원히 아름다운 마무리를 도모하려고 하였으나 그 요령을 얻지 못했더니일관(日官)이 고하기를송도의 터는 지기(地氣)가 오래 되어 쇠해 가고화산(華山)의 남쪽은 지세(地勢)가 좋고 모든 술법에 맞으니이 곳에 나가서 새 도읍을 정하라.’ 하므로(이단이 여러 신하들에게 묻고 태묘에 고유하여 10월 25일에 한양으로 이어한 것인데유사(有司)가 또 고하기를태묘는 선왕의 신령을 봉안하는 곳이요궁궐은 신민의 정사를 듣는 곳이니모두 안 지을 수 없는 것이라.’ 하므로유사에게 분부하여 이 달 초4일에 기공하게 하였습니다크나큰 역사를 일으키니 이 백성의 괴로움이 많을 것이 염려되니 우러러 아뢰옵건대 황천께서는 신()의 마음을 굽어 보살피사 비 오고 개는 날을 때 맞추어 주시고 공사가 잘되게 하여 큰 도읍을 만들고 편안히 살게 해서 위로 천명(天命)을 무궁하게 도우시고 아래로는 민생을 길이 보호해 주시면(이단은 황천을 정성껏 받들어서 제사를 더욱 경건히 올릴 것이며때와 기회를 경계하여 정사를 게을리 하지 않고 신하와 백성과 더불어 함께 태평을 누리겠나이다.”하였다.

 

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金立堅)을 보내서 산천(山川)의 신()에게 고유하게 하였는데그 고유문에 왕은 이르노라! 백악(白岳)과 목멱산(木覓山)의 신령과 한강과 양진(楊津신령이며 여러 물귀신이여대개 옛 날부터 도읍을 정하는 자는 반드시 산()을 봉하여 진()이라 하고물을 표()하여 기()라 하였다. 명산(名山대천(大川)으로 경내(境內)에 있는 것은 상시로 제사를 지내는 법전에 등록한 것이니그 것은 신령의 도움을 빌고 신령의 도움에 보답하기 때문이다돌이켜 보건대 변변치 못한 내가 신민의 추대에 부대끼어 고려 국왕의 자리에 앉아 사업을 삼가면서 나라를 다스린 지 이미 3년이라이 번에 일관의 말에 따라 한양에 도읍을 정하고 태묘와 궁궐을 경영하기 위하여 이미 날짜를 정했으나 크나큰 공사를 일으키는 데 백성들의 힘이 상하지나 아니할까 또는 비와 추위와 더위가 혹시나 그 때를 잃어버려 공사에 방해가 있을까 염려하여 이제 문하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과 판3사사 정도전 등을 거느리고 한마음으로 재계하고 목욕하여 이 달 초3일에 참찬문하부사 김입견을 보내서 폐백과 전물(奠物)을 갖추어 여러 신령에게 고하노니 이 번에 이 공사를 일으킨 것은 내 한 몸의 안일(安逸)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요이 제사를 지내서 백성들이 천명을 한없이 맞아들이자는 것이니그대들 신령이 있거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알아주어음양(陰陽)을 탈 없이 하고 병이 생기지 않게 하며변고가 일지 않게 하여 큰 공사를 성취하고 큰 업적을 정하도록 하면 내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도 감히 나 혼자만 편안히 지내지 않고 후세에 이르기까지 때를 따라서 제사를 지낼 것이니 ()도 또한 영원히 제사밥인 향식(享食)을 가지리라그러므로 이에 알리는 바이다.”하였다.

 

 

한성(漢城문화재보호구역 500m 안 현상변경 불허가 기본 원칙)을 축조하기 시작한 직후인 1395년 6월 6일 태조(太祖) 이단(李旦)이 고려시대 지명인 한양부(漢陽府)를 고쳐서 한성부(漢城府)라 하고 아전들과 백성들을 견주(見州)로 옮기고 양주군(楊州郡)이라 고쳤다. 1396년 9월 태조가 태묘와 경복궁을 낙성(落成)하였다.1396년 9월 24일 태조 이단이 한성(漢城)을 건축하는 축성역(築城役)이 끝나자 역(役)을 하는 장정(壯丁)인 정부(丁夫)를 돌려보냈다.1399년 3월 7일 정종이 개성 유후사(留後司)로 환도(還都)하였다. 1400년 12월 22일 한성(漢城)에 환도하기를 의논하는데, 평양 백(平壤 伯) 조준(趙浚)·창녕 백(昌寧 伯) 성석린(成石璘) 이하 문신(文臣) 10여 인에게 이르기를 “불행히 수창궁에 화재가 있었으니, 경 등은 서운관(書雲觀)의 비밀 도적(祕密 圖籍)을 상고하여 천도(遷都)의 이해를 의논해 아뢰도록 하라.”하니, 이 때에 의논이 분운(紛紜)하여 정해지지 못하였는데, 우정승 하윤(河崙)이 건의하기를 “마땅히 무악(毋岳)에 도읍하여야 합니다.”하였다. 정종이 여러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참위(讖緯) 술수(術數)의 말이 이러쿵저러쿵 그치지 않아 인심을 현혹(眩惑)하게 하니, 어떻게 처리할까?”하니, 여러 재상이 모두 말하기를 “따를 수 없습니다.”하였으나, 대사헌(大司憲) 김약채(金若采)는 홀로 그대로 따라야 된다고 하였다. 정종이 말하기를 “신도(新都) 한성(漢城)은 부왕 태조께서 창건하신 것이니 어찌 반드시 따로 도읍을 세워서 백성을 수고롭게 하겠는가?” 하였다.

 

1404년 1월 9일 태종이 농사가 잘 되기를 비는 기곡(祈穀원단제(圓壇祭)를 한성(漢城)인 한경(漢京)에서 행하였으니 해마다 행하는 일이었다. 9월 1일 성산군(星山君이직(李稷취산군(鷲山君신극례(辛克禮)로 한경(漢京)의 이궁 조성도감 제조(離宮 造成都監 提調)를 삼았다태상왕(太上王)이 지신사(知申事박석명(朴錫命)을 불러 태종에게 전지(傳旨)하기를 “천도(遷都)하는 번거로움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마는 송도(松都)는 왕씨(王氏)의 구도(舊都)이니그대로 거주(居住)할 수는 없다.”하니 태종이 의정부에 하지(下旨)하기를한성(漢城)은 우리 태상왕이 창건한 땅이고사직과 태묘가 있으니오래 비워 두고 거주하지 않으면선조의 뜻을 계승하는 효도가 아닐까 한다명년 겨울에는 내가 마땅히 옮겨 거주할 터이니응당 궁실을 수즙(修葺)하게 해야할 것이다.”하고드디어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 9월 9일 한경(漢京)에 이궁(離宮)을 지을 자리를 상지(相地)하도록 명하고유한우(劉旱雨윤신달(尹莘達이양달(李陽達)을 보내어 상지(相地)하였다.

 

1405년 10월 11일 태종의 거가(車駕)가 한성(漢城)인 한경(漢京)에 이르러 태묘(太廟)에 알현(謁見)하고이궁(離宮)이 아직 완성되기 않아 연화방(蓮花坊)의 고(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조준(趙浚)의 사제에 임어하였다. 1406년 1월 7일 태종이 백악(白嶽)의 성황신(城隍神)에게 녹(祿)을 주었다. 1407년 4월 20일 태종이 한성부(漢城府)에서 한성(漢城)에 대한 사의(事宜두어 조목을 올리기를 “한성(漢城) 5()의 각 방()이 전()에 방의 이름인 방명(坊名)을 세워서 변별(辨別)하여 보게 하였는데지금 이 것이 모두 퇴락(頹落)하였으니 ()의 이름·다리의 이름·거리의 이름을 다시 세우도록 허락하소서한성(漢城안의 큰 길 이외에 여리(閭里)의 각 길도 본래는 모두 평평하고 곧아서 거량(車兩)의 출입(出入)을 편리하게 하였었는데지금 무식(無識)한 사람들이 자기의 주거(住居)를 넓히려고 하여 길을 침로해 울타리를 만들어서 길이 좁고 구불구불해졌으며 혹은 툭 튀어나오게 집을 짓고 심한 자는 길을 막아서 다니기에 불편하고 화기(火氣)가 두렵사오니 도로(道路)를 다시 살펴보아서 전과 같이 닦아 넓히소서한성(漢城)의 가사(家舍)가 모두 띠로 덮었고민가(民家)가 조밀하여 화재가 두려우니 각 방()에 한 관령(管領)마다 물독인 수옹(水甕) 2 곳을 설치하여 화재에 대비하소서길 옆의 각 호()는 모두 나무를 심게 하고냇가의 각 호는 각각 두 양안(兩岸)에 제방(堤防)을 쌓고 나무를 심게 하소서.” 하니 윤허하였다.

 

한성(漢城문화재보호구역 500m 안 현상변경 불허가 기본 원칙)의 둘레가 9천 9백 75()인데북쪽 백악사(白嶽祠)로부터 남쪽 목멱사(木覓祠)에 이르는 지름이 6천 63보요동쪽 흥인문(興仁門)으로부터 서쪽 돈의문(敦義門)에 이른 지름이 4천 3백 86보가 되며정동(正東)을 흥인문정서(正西)를 돈의문정북(正北)을 숙청문(肅淸門), 동북(東北)을 동소문(東小門)인 홍화문(弘化門), 동남(東南)을 수구문(水口門)인 광희문(光熙門), 서남(西南)을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 소북(小北)을 서소문(西小門)인 소덕문(昭德門), 서북(西北)을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태조(太祖) 5년 병자 봄에 각 도의 민정(民丁) 11만 8천 76명을 모아 한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니번와(燔瓦및 석회군(石灰軍)이 또 1천 7백 59명이었다가을에 이르러 또 민정 7만 9천 4백 31명을 모아서 8월 13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9월 그믐날에 역사를 파하였으며, 1422(세종 4)년 임인에 상왕 태종의 명으로 토성(土城)을 모두 석성(石城)으로 축조하였는데, 8도의 군사 총 32만 2천 4백 명을 모아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여 2월에 마치었다한성(漢城) 동쪽에처음에 수문(水門) 3을 열었는데장마를 만나면 문이 막히는 것을 없애기 위하여 2문을 더 만들었다1422년(세종 4년) 석성(石城)으로 축조한 한성(漢城)이 낙성(落成)되었다.

 

동부(東部) 12()은 숭신(崇信연화(蓮花서운(瑞雲덕성(德成숭교(崇敎연희(燕喜관덕(觀德천달(泉達흥성(興盛창선(彰善건덕(建德인창(仁昌)이다남부(南部) 11()은 광통(廣通호현(好賢명례(明禮대평(大平훈도(薰陶성명(誠明낙선(樂善정심(貞心명철(明哲성신(誠身예성(禮成)이다서부(西部) 8()은 인달(仁達적선(積善여경(餘慶황화(皇華양생(養生신화(神化반석(盤石반송(盤松)이다북부(北部) 10()은 광화(廣化양덕(陽德가회(嘉會안국(安國관광(觀光진장(鎭長명통(明通준수(俊秀순화(順化의통(義通)이다중부(中部) 8()은 징청(澄淸서린(瑞麟수진(壽進견평(堅平관인(寬仁경행(慶幸정선(貞善장통(長通)이다태묘(太廟)는 중부 정선방(貞善坊)과 동부 연화방(蓮花坊중앙에 있으니담 둘레에 소나무를 심었다영녕전(永寧殿)은 태묘의 담 안 서쪽에 있다태조(太祖)가 하늘의 천명(天命)을 받아 왕이 되니 왕()으로 목(((()의 네 조상을 추존하고 태묘를 세워 제사를 받들다가 태종(太宗)을 부묘(祔廟)하게 되니 목조(穆祖)를 체천(遞遷)해야 하므로 따로 이 전각을 세우고 목조의 신주를 옮겨 모시었으며 ((()의 세 조상도 또한 이 곳에 차례로 옮겨 모시었다.

 

사직(社稷)은 인달방(仁達坊)에 있으니 둘레의 담에 소나무를 심었다문소전(文昭殿)은 처음에 문소전을 창덕궁 서북쪽에 세우고 태조 강헌대왕(太祖 康憲大王)과 신의왕후(神懿王后)의 화상신어(神御)을 모시고또 광효전(廣孝殿)을 창덕궁 동북쪽에 세우고 태종 공정대왕(太宗 恭定大王)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화상을 모시었다가그 후에 송()나라 경령궁(景靈宮)의 제도에 의하여 원묘(原廟)를 경복궁 한성 안 동북쪽에 고쳐 지었는데 앞에는 묘(), 뒤에는 침()으로 하여 한결같이 고례(古禮)를 따르고 이름을 문소전이라 하여 두 임금(태조·태종)의 화상을 옮겨 모시었다문묘(文廟)는 숭교방(崇敎坊)에 있고뜰에 비()가 있다성균관 학관(成均館 學官)을 두어 선비를 가르치는데, 2백 사람으로써 액수를 정하였다옆에 양현고(養賢庫)를 두어 섬학전(贍學田) 1천 35()을 주었고세종 13(1431) 신해에 9백 65결을 더 주었다.

 

경복궁(景福宮)은 백악산(白岳山남쪽에 있다연침(燕寢)을 강녕전(康寧殿), 동쪽 작은 침전(寢殿)을 연생전(延生殿), 서쪽 작은 침전을 경성전(慶成殿), 또 그 남쪽을 정사를 보는 사정전(思政殿), 또 그 남쪽을 조회를 받는 근정전(勤政殿), 내문(內門)을 근정(勤政), 안 동문(東門)을 일화(日華), 동각루(東閣樓)를 융문(隆文), 서각루(西閣樓)를 융무(隆武)라 한다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밖에 있다홍례문(弘禮門)은 영제교 남쪽에 있다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 서쪽 담안에 있는데둘레가 못으로 되어 있다동궁(東宮)은 건춘문(建春門안에 있다궁성(宮城)은 둘레가 1천 8백 13()이다동문(東門)을 건춘(建春), 서문(西門)을 영추(迎秋), 남문(南門)을 광화(光化)라 한다.문루(門樓)가 2층이요누 위에 종고(鍾鼓)를 달고 새벽과 저녁에 울리어 시각을 알리는 시보를 엄하게 한다문 남쪽 좌우에 의정부(議政府중추원(中樞院)·6(六曹사헌부(司憲府등 각사(各司)의 공해(公廨)를 벌려 놓았다창덕궁(昌德宮)은 정선방(貞善坊)에 있다태종(太宗) 5(1405) 을유에 세워서 이궁(離宮)으로 삼았다조회를 받는 인정전(仁政殿), 안문을 인정(仁政), 중문을 진선(進善), 바깥문을 돈화(敦化)라 한다광연루(廣延樓)는 창덕궁 동쪽에 있다수강궁(壽康宮)은 연화방(蓮花坊)에 있다태종(太宗) 18(1418) 무술에 왕위를 물려주고따로 이 궁을 지어 거처하였다선양정(善養亭)은 창덕궁 남쪽 언덕에 있다.

 

혜정교(惠政橋)는 중부 서린방(瑞麟坊북쪽에 있다운종가(雲從街)는 곧 서린방과 수진방(壽進坊)의 중앙이다통운교(通雲橋)는 관인방(寬仁坊남쪽에 있다북광통교(北廣通橋)는 광통방 북쪽에 있다남광통교(南廣通橋)는 태평방(太平防)에 있다큰 저자인 대시(大市)는 중부 장통방(長通坊)과 경행방(慶幸坊중앙에 있다종루(鍾樓)는 한성(漢城)의 중앙에 있다. 2층으로 되어 있고누 위에 종을 달아서 한성(漢城)의 안팎에 새벽과 저녁을 깨우쳐 준다한성 좌우 행랑(行廊)은 대략 2천 27간이다태평관(太平館)은 숭례문(崇禮門안 황화방(皇華坊)에 있다이 곳에서 중국 사신(使臣)을 접대하는데옆에다 별전(別殿)을 지어서 임금이 쉬는 곳으로 삼았다모화관(慕華館)은 돈의문(敦義門밖 서북쪽에 있다본이름은 모화루(慕華樓)이니중국 사신(使臣)을 영접하는 곳으로 삼았는데세종 12(1430) 경술에 고쳐 짓고 관()으로 하였다남쪽에 네모진 못이 있는데낮은 담을 쌓고 버들을 심었다. 5(五部)의 호수(戶數)는 1만 7천 15성저십리(城底十里)의 동쪽은 양주(楊州송계원(松溪院및 대현(大峴)에 이르고서쪽은 양화도(楊花渡및 고양(高陽덕수원(德水院)에 이르고남쪽은 한강 및 노도(露渡)에 이른다호수는 1천 7백 79호이다간전(墾田)은 1천 4백 15()이다.

 

삼각산(三角山)은 한성 밖 정북(正北)에 있으니일명(一名)은 화산(華山)이다신라 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 일컬었다한성의 진산(鎭山)은 백악(白岳)이다산정(山頂)에 사우(祠宇)가 있어서 삼각산의 신을 제사 지내는데백악을 붙여서 지낸다중사(中祀)로 한다목멱사(木覓祠)는 한성 목멱산 꼭대기에 있으니소사(小祀)이다봉화(烽火)가 5곳이 있으니, 1()은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江原道)로부터 온 양주(楊州아차산(峨嵯山봉화에 응하고, 2()는 경상도로부터 온 광주(廣州천천산(穿川山봉화에 응하고, 3()은 평안도·황해도로부터 육로(陸路)로 온 무악(毋岳동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4()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海路)로 온 무악 서쪽 봉우리의 봉화에 응하고, 5()는 전라도와 충청도로부터 온 양천(陽川개화산(開花山봉화와 아차산(峨嵯山봉화에 응하고또 함길도(咸吉道)와 강원도로부터 온 풍양(豐壤대이산(大伊山봉화에 응한다무악(毋岳)은 모화관 서쪽에 있다위에 봉화가 두 곳이 있으니동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육로로 온 고양(高陽소달산(所達山봉화에 응하고서쪽 봉우리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해로로 온 영서역(迎曙驛서산(西山봉화에 응한다.

 

연희궁(衍禧宮)은 무악 남쪽에 있다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하윤(河崙)이 일찍이 말하기를 이 땅이 무악의 명당(明堂)이 되어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하다.”고 하였는데세종 3(1421) 신축에 태종이 그 말을 생각하고 이궁(離宮)을 짓게 하였다우사단(雩祀壇동방 토룡단(東方土龍壇선농단(先農壇)은 모두 흥인문(興仁門밖 평촌(坪村)에 있다마보단(馬步壇마조단(馬祖壇선목단(先牧壇마사단(馬社壇)은 모두 흥인문 밖 사근사리(沙斤寺里)에 있다선잠단(先蠶壇)은 동소문 밖 사한이(沙閑伊)에 있다노인성단(老人星壇원단(圓壇영성단(靈星壇풍운뢰우단(風雲雷雨壇)은 모두 숭례문 밖 둔지산(屯地山)에 있다남방 토룡단(南方土龍壇)은 한강 북쪽에 있다서방 토룡단(西方土龍壇)은 가을두(加乙頭)에 있다북교단(北郊壇북방 토룡단(北方土龍壇여제단(厲祭壇)은 모두 창의문(彰義門밖에 있다동적전(東籍田)은 흥인문 밖에 있다태묘·사직·산천(山川백신(百神)의 제미인 자성(棄盛)을 제공한다또 구도(舊都개성의 문교(門郊)에 서적전(西籍田)이 있다.

 

한강도(漢江渡)는 목멱산 남쪽에 있다너비 2백 보예전에는 사평도(沙平渡또는 사리진도(沙里津渡)라 하였다북쪽에 단()이 있는데·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며중사(中祀)로 한다도승(渡丞) 1인을 두어서 드나드는 사람을 조사한다나루 머리에 제천정(濟川亭)이 있다용산강(龍山江)은 숭례문 밖 서남쪽 9리에 있다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군자강감(軍資江監)과 풍저강창(豐儲江倉)이 있다서강(西江)은 서소문 밖 11리에 있다또한 배로 실어 온 세곡(稅穀)을 거둬들이는 곳으로서광흥강창(廣興江倉)과 풍저강창(豐儲江倉)이 있다가을두(加乙頭)는 서소문 밖 12리에 있다오똑하고 기이하게 빼어났고남쪽으로 큰 강을 임하여 벽처럼 서서백 길이나 되는데나무를 휘어잡고 아래를 굽어보면 터럭끝이 오싹해진다빙고(氷庫)는 곧 예전의 얼음집인 능음(淩陰)이다하나는 두모포(豆毛浦)에 있으니나라 제향에 쓸 얼음을 바치고하나는 한강 아래 백목동(栢木洞)에 있으니어선(御膳), 나라 손님 접대 또는 백관(百官)에게 나누어 줄 얼음을 바친다.

 

조지소(造紙所)는 장의사동(壯義寺洞)에 있다처음에는 사대(事大)의 표((((자문(咨文)에 쓸 종이를전라도 전주(全州)와 남원부(南原府)에서 해마다 세밑에 바쳤는데 많이 쓰는 것을 대지 못하였다세종 2년에 특명으로 조지소를 두어 종이를 만들었는데품질이 옛 것에 견주어 훨씬 곱고 좋았다이로 말미암아 전주부와 남원부의 세공(歲貢독촉의 폐단이 비로소 없어졌다물방아인 수전(水輾)은 장의사(壯義寺동구(洞口)에 있다동활인원(東活人院)은 동소문 밖에 있다서활인원(西活人院)은 서소문 밖에 있다옛 이름은 대비원(大悲院)이다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고 또 의원과 무당을 두어서 한성 안에 병들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을 모두 이 곳에 모아 놓고···약을 주며아울러 옷·이불·자리를 주어 편하도록 보호해 주고만일 죽는 이가 있으면 잘 묻어 준다.

 

(()을 제조하는 귀후소(歸厚所)는 용산강 가에 있고 제조(提調)와 별좌(別坐)를 두며 승려들로 일을 주장하게 하여 (()을 만들어 팔아서 초상집의 급작스럽게 당한 일을 예비하게 한다흥천사(興天寺)는 황화방(皇華坊)에 있는데선종(禪宗)에 속한다. 3층탑이 있고그 속에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사리(舍利)를 안치하였다태조 이단이 세우고 밭 2백 50()을 주었다흥덕사(興德寺)는 연희방(燕喜坊)에 있는데교종(敎宗)에 속한다태조가 궁()을 버리고 절을 만들어서 밭 2백 50()을 주었다장의사(壯義寺)는 창의문(彰義門밖에 있는데교종(敎宗)에 속한다밭 2백 50결을 주었다봉경(封境)은 동쪽으로 양양(襄陽)에 이르기 5백 40서쪽으로 풍천(豐川)에 이르기 6백 리남쪽으로 해진(海珍)에 이르기 9백 80북쪽으로 여연(閭延)에 이르기 1천 4백 70동북쪽으로 경원(慶源)에 이르기 2천 1백 90동남쪽으로 동래(東萊)에 이르기 8백 70서남쪽으로 태안(泰安)에 이르기 3백 90서북쪽으로 의주(義州)에 이르기 1천 1백 40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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