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6월 임오군란(壬午軍亂) 명성황후 충주(忠州) 장호원(長湖院) 잠어(潛御)


1882년 6월 임오군란(壬午軍亂) 명성황후 충주(忠州) 장호원(長湖院) 잠어(潛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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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년 6월 5일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가을철에 온갖 곡식(穀食)이 익은 추성(秋成) 후의 농사 형편을 물론 미리 예료(預料)할 수 없습니다만 대체로 기전(畿甸)은 틀림없이 흉년인 겸(歉)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도하(都下) 백성들의 우환이 실로 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종전에는 이러한 때면 매 달 양곡을 발매(發賣)하여 기근을 구제하였습니다만 지금 선혜청(宣惠廳)에 무슨 저축된 곡식이 있습니까? 다만 전날 군자감(軍資監)에서 나라에서 매 월 주는 녹봉(祿峰)을 나누어 주는 방료(放料) 때의 일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도감(都監)의 군졸들이 받은 곡식이 섬이 차지 않는다면서 두 손으로 각각 1섬씩 들고 하는 말이 ‘13개월 동안 급료를 주지 않다가 지금 겨우 한 달분을 분급(分給)한 것이 바로 이와 같은가?’라고 하면서 해당 고지기 고직을 구타(敺打)하여 현재 생사를 분간하기 어렵습니다. 이어 대청 위에 석괴(石塊)들을 마구 던져 해당 낭관(郞官)이 도피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어찌 작은 문제이겠습니까?”하니 고조가 하교하기를 “13개월이나 급료를 내주지 못한 것도 이미 민망스러운 일인데 게다가 섬이 차지 않은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선혜청의 도봉소(都捧所)에서 획송(劃送)하면 중간에서 축나는 일이 없을 수 없다고 합니다. 비록 그러하나 이는 크게 기율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즉시 무위영 대장(武衛營 大將)에게 말은 전하여 엄하게 조사한 다음 법률을 적용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것은 아마 군사들의 가슴속에 억울함이 쌓인 데에 연유한 듯합니다.신이 궁중(宮中)과 부중(府中)이 함께 일체(一體)라는 뜻으로 지난 날에 진술을 올린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무위소의 군사가 받는 것은 완전하고 훈련 도감의 군사가 받는 것은 이처럼 완전하지 않았으니, 어찌 천장을 쳐다보면서 한탄하는 일이 없겠습니까? 10년을 양성하여 하루 동안에 쓰는 것은 마찬가지인데 만약 그 사이에 후함과 박함의 차이가 없지 않아 평일에 원망이 쌓였다면 어찌 우려할 바가 없겠습니까?근래에 전하께서 행차할 때마다 군사들에게 음식을 베푸는 대신 돈으로 주는 건호궤(乾犒饋)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해 영(營)에서 돈이 모자라서 나누어주지 못하였으니 이는 유명무실한 문서일 뿐 혜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먹여줄 것을 바라는 식량은 아홉 말의 쌀에 불과한데 이 것조차도 1년이 지나도록 충분히 주지 않아서 스스로 의식(衣食)을 마련하여 분주히 복역하면서도 감히 군령을 어기지 않았으니 오히려 기율이 있다고 충분히 말할 수 있습니다.”하였다.


6월 9일 고조가 전교하기를 “무위 대장(武衛大將) 이경하(李景夏)는 동별영(東別營)에 달려가 소란을 일으킨 군졸(軍卒)을 불러들여 조사하고, 잘 타일러서 물러가게 한 다음 입품(入稟)하라.”하였다.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듣자니 수백 명의 군사들이 의금부(義禁府)에 돌입하여 옥문을 부수고 기결수(旣決囚)를 가두는 남간(南間)에 갇힌 죄인 백낙관(白樂寬)을 끌어내어 겹겹이 옹호하여 갔다고 합니다. 어찌 이런 변괴가 있단 말입니까? 속히 좌포청(左捕廳)과 우포청(右捕廳)으로 하여금 포교(捕校)와 포졸(捕卒)을 많이 보내 기간을 정해 잡아내서 형구(形具)를 채워 다시 가두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소란을 일으킨 군졸(軍卒)에 이르러서는 심상히 처리해서는 안 되니, 또한 해 영(營)의 장신(將臣)들로 하여금 엄하게 조사한 다음 품처(稟處)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하였다. 경기 감사(京畿 監司) 김보현(金輔鉉)의 장계(狀啓)에 ‘난민(亂民)들이 청수관(淸水館)에 있던 일본인(日本人)을 죽이고 인근의 집들에 마구 방화하고 나서 경기 감영에 마구 몰려들어와 무기고(武器庫)를 부수고 무기를 훔쳐 냈습니다. 전에 없던 변고가 경기감영에서 발생하였으므로 황공한 마음으로 대죄(待罪)합니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대죄하지 말라.”하였다. 이재면(李載冕)을 무위 대장(武衛大將)으로 삼았다.전교하기를 “전 무위대장(武衛大將) 이경하(李景夏), 도봉소 당상관(都捧所 堂上官) 심순택(沈舜澤), 선혜청 당상관(宣惠廳 堂上官) 민겸호(閔謙鎬)에게 모두 파직(罷職)하는 법을 시행하라.”하였다. 6월 10일 난병(亂兵)들이 범궐(犯闕)하였다.선혜청 제조(宣惠廳 提調) 민겸호(閔謙鎬),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보현(金輔鉉)이 난군(亂軍)에 의하여 살해되었다.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이최응(李最應)이 졸(卒)하였다. 난군(亂軍)에 의하여 살해된 것이다. 전교하기를 “이 대신(大臣)의 서단(逝單)이 갑자기 이르니, 이 것이 무슨 일인가? 평소 바르고 단정한 몸가짐과 인후(仁厚)한 성품을 지닌 데다 그 처지가 자별(自別)한 데야 더 말할 것이 있는가? 놀라움과 슬픔이 더할 나위 없으니 무슨 말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졸(卒)한 영돈녕부사 이최응(李最應)의 예장(禮葬) 등의 일은 규례대로 거행하라. 동원 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수송하고 녹봉(祿俸)은 3년을 기한해서 그대로 지급할 것이며 성복(成服)하는 날 승지(承旨)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라”하였다. 


명성황후 잠어(潛御)를 아는 고조는 전교하기를 “중궁전(中宮殿)이 오늘 오시(午時)에 승하(昇遐)하였다. 거애(擧哀)하는 절차는 규례대로 마련하고 망곡처(望哭處)는 명정전(明政殿) 뜰로 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총호사(總護使)는 영의정(領議政)으로 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빈전(殯殿)은 환경전(歡慶殿)으로 하라.”하였다.이재면(李載冕), 조영하(趙寧夏), 김병시(金炳始)를 빈전도감 제조(殯殿都監 提調)로, 이회정(李會正), 민영목(閔泳穆), 정범조(鄭範朝)를 국장도감 제조(國葬都監 提調)로, 김영수(金永壽), 이인명(李寅命), 한경원(韓敬源)을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 提調)로, 이승우(李勝宇)는 부고사(訃告使)로, 이건창(李建昌)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어영청(御營廳)에서 ‘방금 신영(新營)의 입직(入直) 천총(千總)과 동별영(東別營)의 입직 천총이 보고한 것을 보니 반란을 일으킨 군졸(軍卒)들이 군영(軍營)에 들이닥쳐 각종 창고를 부수고 환도(環刀)와 유삼(油衫)을 탈취한 후 이어 군기고(軍器庫)를 부수고 조총(鳥銃)과 환도를 또한 탈취해 갔다고 하였습니다. 듣기만 해도 몹시 놀랍고 두려운 일입니다. 금지시키지 못한 해당 천총 이근석(李根奭)홍규(洪圭)를 모두 유사(攸司)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할 것입니다. 신도 황송한 마음으로 대죄(待罪)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전교하기를 “천총은 특별히 분간(分揀)하고 경은 대죄하지 말라.”하였다.6월 14일 하교하기를 “잠어(潛御)한 곤전(坤殿)의 체백(體魄)을 4방에 찾아보았지만 끝내 그림자도 없으니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또 그 때의 형편에 대해서는 내가 목도한 사람이다. 이런 형편에 이르러서는 입던 옷을 가지고 장사를 지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 문제는 극히 중차대한 일이므로 아래에서는 감히 말할 수 없지만 이미 우리 왕조에 인용할 만한 전례가 있기 때문에 내가 말을 꺼내는 바이니 제반 시행 절차는 입던 옷을 가지고 장사지내는 것으로 마련하라.”하였다.

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통곡하면서 아뢰기를 “지금 삼가 전하의 하교를 받고 보니 망극한 중에 더욱 망극하여 기가 막혀 무어라 우러러 아뢸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하교는 비록 이러하지만 만일 온갖 찾아낼 방도를 다한다면 신명(神明)이 감격할 것이니, 끝내 흔적을 찾아내지 못할 그럴 이치가 있겠습니까?”하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김병국(金炳國)은 통곡하면서 아뢰기를 “이 하교를 받드니 기가 막혀 어찌할 수 없습니다. 곤전의 옥체를 끝내 재궁(梓宮)에 봉안(奉安)할 수 없다면 망극한 중에 더욱 망극한 일입니다. 다시 더 널리 수소문한다면 신명이 어찌 도와주지 않겠습니까?”하니, 하교하기를 “찾을 방도에 대해 나도 온갖 힘을 다 써보았으나 다시 더해 볼 방법이 없다.”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전날 사변은 대궐 안팎의 백 보 정도 지점에서 벌어졌으니 어찌하여 찾아볼 길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끝까지 찾지 않으면 지척간이라도 혹 모를 수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더 널리 찾아봄으로써 며칠이 더 걸린다 해도 당연한 도리를 다하여야 합니다. 권도(權道)를 따라 예를 행하는 것이야 이르건 늦건 간에 무슨 따질 것이 있겠습니까?”하니, 김병국이 아뢰기를 “위에서 애써 찾는 데에 대하여 신들은 사실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탐문하는 중에서도 더욱더 탐문하여 설사 여러 날 걸린다 하더라도 기어이 종적을 찾아내고야 만다면 이 것은 망극한 중에 천만다행이 될 것입니다. 장사 의식이 좀 늦어지는 것쯤은 관계할 필요가 없습니다.”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옛날에 난군(亂軍) 속에서 부모를 잃은 어떤 사람이 한 해가 넘도록 길에서 울부짖다가 마침내 그 유해를 찾아냈습니다. 오늘 신들은 불과 백 보도 벗어나지 않는 곳에서 벌어진 일에 대해 결국 성의를 다하지 못하여 차마 권도를 따르는 하교를 받든다면 이 것은 모두 신들의 죄입니다. 오늘 신들이 아뢰는 것은 실로 원통하고 기가 막힌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비록 있는 힘껏 찾아보았다고 하교하셨지만 아직도 미진할 우려가 있을 수 있는 만큼 하교를 받들 수 없어서 이와 같이 눈물을 삼키며 우러러 아룁니다.”하였다.

7월 18일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臣僚)와 기로(耆老), 군민(軍民), 한량인(閑良人)들에게 전교하기를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올 해 6월에 있었던 임오군란은 바로 천고(千古)에 없던 변고였다. 창황(倉皇)한 나머지 미처 징벌하지는 못하였으나 사람들이 분하게 여길 뿐 아니라 죄를 범한 무리들도 반드시 죽을 날이 있다는 것을 알라. 다행히도 상국(上國)에서 군사를 풀어 원조하여 난을 일으킨 군사 10명(名)을 잡아서 극형에 처하였다. 천토(天討)가 이미 가해지니 대의(大義)가 이제야 밝아졌다. 만일 끝까지 조사하고 엄히 징벌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으려고 한다면 도리어 죄 없는 사람들이 뜻밖에 걸려들어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큰 덕이 어그러지게 될까 염려스럽다.무릇 임금으로서 백성이 없고 군사가 없으면 어떻게 나라를 유지하겠는가? 이에 특별히 죄를 용서하는 전교를 내려 뭇사람과 함께 새로 시작하려는 것이다. 지금 이후로 변란과 관계된 모든 문제는 일체 따지지 않으며 참수형(斬首刑) 이하에 해당하는 자를 용서한다. 너희 대소 군민(軍民)들은 제각기 안심하고 편안히 살면서 뜬소문에 동요하지 말고 두려워하거나 망령되게 행동하지 말며 나 한사람을 도와서 종사(宗社)를 보위하라.아! 내가 진심으로 고하는 것이지 결코 빈 말로 너희 백성들과 군사들을 속이려는 것은 아니다. 너희들이 ‘나라에서 겉으로는 안심시켜 무마하지만 속으로는 다른 속셈을 품고 있다.’라고 말들을 하는데 이 것은 필부(匹夫)가 남을 속이는 술책이다. 임금의 말은 일단 나가면 다시 변경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 너희들 군민들은 각기 잘 알아두도록 하라.”하였다.

7월 20일 8도(八道)와 4도(四都)의 늙은이들과 백성들에게 하유(下諭)하기를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부덕한 내가 외람되게 왕위에 오른 지 19년 동안에 덕을 밝히지 못하여 정사는 그릇되었고 백성들은 흩어졌으며, 위로는 죄가 쌓이고 몸에는 재앙이 모여들었다. 이 것은 나로 말미암아 불러들인 것이니 아무리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임금의 자리에 오른 이래로 토목공사를 크게 벌였고 백성들의 재물을 억지로 긁어 들여 가난한 사람이나 잘 사는 사람이나 다같이 곤궁하게 만들었으니 이 것은 나의 죄이다. 자주 화폐를 고치고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인 것도 나의 죄이다. 사당과 서원(書院)을 허물고 철폐하여 충현(忠賢)에게 제사지내지 않은 것도 나의 죄이며, 기호품을 구하고 상 내리기를 절도 없이 한 것도 나의 죄이다. 신명에게 복을 내려주기를 비는 제사를 지나치게 믿고 내탕고(內帑庫)의 제물을 허비한 것도 나의 죄이다. 사람을 널리 등용하지 못하고 종친(宗親)과 척신(戚臣)을 높인 것도 나의 죄이다. 대궐에 대한 단속이 엄하지 못하여 궁녀(宮女)와 내시(內侍)들이 은택을 바라게만 한 것도 나의 죄이다. 뇌물이 공공연히 성행하며, 탐오하는 자들이 징계 받지 않고 가난한 백성들의 고통스러운 정상이 위에 보고 되지 않은 것도 나의 죄이다. 저축이 오랫동안 텅 비었으며 군사와 아전(衙前)들을 먹여주지 못하고, 공가(貢價)를 오랫동안 주지 못하여 시정(市井)이 폐업한 것도 나의 죄이다. 여러 나라들과 우호관계를 가지는 것은 바로 시세(時勢)의 요구인데 조치가 방도를 잃어 한갓 백성들의 의혹만 더하게 하였으니 이 것도 나의 죄이다. 이뿐만 아니라 귀신이 노하고 사람이 원망하여 온갖 변고가 쏟아져 나와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멸하고 재변이 6친(六親)에까지 미치게 됨으로써 멀리 청국에까지 근심을 끼쳤고 아래로는 만백성들을 소란스럽게 만들었으며 이웃 나라에 신의를 잃고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 또한 나의 죄인 것이다.

아! 나의 죄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면목으로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을 다시 대하겠는가? 슬프고 부끄럽고 두려워서 실로 임금 노릇하는 즐거움이 없다. 너희 대소 인민(人民)들은 내가 종전의 과오를 버리고 스스로 새로워지는 것을 허락하려는가? 내 이제 마음을 깨끗이 씻고 전날의 교훈을 살려 앞으로는 조심하겠다. 백성들에게 불편했던 종전의 정령(政令)들은 다 없애버리고 어진 관리들을 골라 백성들을 다스리게 할 것이며, 실효 있는 방법을 강구하여 온 나라 사람들과 함께 다시 새롭게 시작하려고 한다. 너희들도 마땅히 제각기 노력할 것이며 훌륭한 계책을 많이 고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의견이 설사 부합되지 않더라도 호되게 책망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만약 종전의 과오를 고치고 함께 나라의 기초를 지킨다면 종사(宗社)의 다행이 될 것이다. 이 번에 난(亂)을 일으킨 역도(逆徒)들을 토벌함에 있어서 극단적인 무력을 행사하지 않고 나머지 무리들을 용서하였으며, 이제 대사령(大赦令)을 나라에 실시하여 다함께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과오를 뉘우치고 있는 형편에 무슨 여가로 남을 책망하겠는가? 아! 나라가 흥하는 것도 언제나 여기에 있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언제나 여기에 있다. 안위(安危)의 기미는 터럭 하나처럼 작은 데 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에 마음을 터놓고 고하는 바이니 잘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다.”하였다.

7월 25일 봉상시 정(奉常寺 正) 서상조(徐相祖)가 상소하기를 “지난 6월에 있었던 임오군란은 천고(千古)의 큰 변고입니다. 명성황후인 중궁 전하(中宮 殿下)께서 급히 화를 피하실 적에 호위하는 반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잠어(潛御)하신 곳을 살피지 못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은 망극한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근래 듣자니 매우 다행스럽게도 중궁 전하께서 조용히 변란에 대처하시어 누추한 곳에 잠어(潛御)해 계신다고 하니 거처하고 계신 곳을 널리 수소문하여 의장(儀裝)을 갖추고 예법에 따라 왕후로 맞아들이소서.”하니, 비답하기를 “근자의 변고는 지난 역사에 없었던 일이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은 본래 확실한 근거가 없는 법이지만 오늘 그대의 상소를 보고 소문이 까닭 없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널리 찾아서 맞아들이는 일을 늦추어서는 안 되겠다.”하였다.전교하기를 중궁전(中宮殿)이 지금 잠어(潛御)해 있으니 백관(百官)들이 복()을 입는 일은 그만둘 것이다.세 도감(都監)을 철파(撤罷)하라.”하였다. 610일 난병(亂兵)들이 대궐에 침범하자 중궁전(中宮殿)은 피하여 사어(司禦) 윤태준(尹泰駿)의 화개동(花開洞) 집에 잠어(潛御)해 있었다. 무감(武監) 홍재희(洪在羲)가 배종(陪從)하였다. 이어 익찬(翊贊) 민응식(閔應植)의 충주(忠州) 장호원(長湖院)의 시골집 향제(鄕第)에 잠어(潛御)하였다. 전교하기를 “중궁전(中宮殿)을 맞이할 의절(儀節)은 예조(禮曹)로 하여금 마련하여 들이게 하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중궁전을 맞이할 때 영의정(領議政)이 나아가라.”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중궁전을 맞이할 때 제학(提學) 김병시(金炳始), 검교 직제학(檢校 直提學) 정범조(鄭範朝), 원임 직각(直閣) 민영목(閔泳穆), 도승지(都承旨) 윤용구(尹用求), 우승지(右承旨) 윤상만(尹相萬), 우부승지(右副承旨) 김학수(金學洙), 홍문관(弘文館)의 한림(翰林)과 주서(注書), 병조(兵曹)의 도총관(都摠管) 그리고 3군부(三軍府)의 당상(堂上)과 낭청(郞廳) 각각 1원(員)씩 중궁전의 행차를 배종(陪從)하라.”하였다.

8월 1일 명성황후인 중궁전(中宮殿)이 환어(還御)하였다.영의정(領議政) 홍순목(洪淳穆)이 아뢰기를 “신은 중궁전을 맞이하는 행차를 배종(陪從)하라는 명을 받고 수백리 길을 다녀왔습니다. 맑고 아름다운 가을 날씨에 왕후 전하께서는 건강한 몸으로 무사히 돌아오셨습니다. 위로는 자전(慈殿)의 간절한 걱정과 아래로는 세자궁(世子宮)의 정성과 효성이 독실하였기에 역사에 없었던 이러한 큰 경사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온 나라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의 더없이 기쁜 마음은 중외(中外)가 똑같습니다.”하니, 봉조하 강로(姜㳣)가 아뢰기를 “오늘의 경사로 말하면 위로는 경사가 있기를 축수하는 세자궁의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아래로는 신민(臣民)들의 기쁜 마음을 위로 하는 것입니다.”하니,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병국(金炳國)이 아뢰기를 “오늘의 기쁨이야 어찌 다 말로 형용할 수 있겠습니까? 환성(歡聲)과 화기(和氣)가 온 나라에 차고 넘칩니다.”하니,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송근수(宋近洙)가 아뢰기를 “오늘의 일은 비단 신민들의 큰 경사일 뿐 아니라 종사(宗社)가 이로부터 반석같이 안정되게 되었으니 어찌 큰 다행이 아니겠습니까?”하니, 하교하기를 “중궁전이 돌아온 뒤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걱정을 크게 위로하였고, 다음으로는 세자(世子)의 사모하던 마음을 위로하게 되었으니 매우 기쁘고도 다행한 일이다. 그런데 당초에는 근심과 번뇌로 심신(心神)이 산란하여 어찌할 줄을 모르고 있었다. 세자는 매 번 중궁전에 대한 말만 비치게 되면 문득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어찌 그러지 않으실 수 있겠습니까?”하고, 이어 아뢰기를 “신령에게 고유하고 온 나라에 반포하는 일을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즉시 명을 내리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신령에게 고유하는 일은 할 수 있으나 온 나라에 반포하는 것은 거리끼는 바가 있어 지금 망설이고 있다.”하였다. 홍순목이 아뢰기를 “이같은 큰 경사에 대해 어찌 아래에 반포하는 조치가 없을 수 있습니까? 조금도 거리낄 것이 없으니 즉시 하교하시기를 삼가 바랍니다.”하니, 하교하기를 “아뢴 대로 하겠다.”하였다.

8월 7일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하례(賀禮)를 받고 사면(赦免)을 반포하였다. 왕세자(王世子)가 각 전궁(殿宮)에 치사(致詞),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렸다. 교문(敎文)에 “왕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천도(天道)가 도우시어 나라의 운세가 크게 새로워졌고 무녀성(婺女星)이 빛나 상서(祥瑞)를 불러들이니 명성황후인 왕비(王妃)가 환궁(還宮)하게 되었다. 이에 윤음을 선포하여 8방(八方)의 백성들에게 유시(諭示)하노라.부덕하고 어리석은 내가 외람되이 어렵고 큰 사업을 계승하였다. 하늘과 조종(祖宗)께서 부여해 준 임금의 자리에서 항상 깊은 못 가에 서 있고, 얇은 얼음을 밟고 있는 듯한 경계하는 마음을 두고 있으니,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여름의 큰 비에 원망하고 탄식하는 백성들을 두고 비단옷을 입고 맛좋은 음식을 먹은들 마음이 어찌 안 할 수 있겠는가? 정사를 위해 걱정하고 애쓰느라 한가할 겨를이 없이 하루에도 만기(萬機)를 처결하고, 휴척(休戚)을 끊임없이 해 온지 지금 19년이 되었다.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 시작된다는 의리가 있는데, 일찍부터 현비(賢妃)가 안을 다스린 공(功)이 있었다. 봄가을로 제수(祭需)를 올리는 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고 공경하고 삼가하였으며, 밤낮으로 사치스러움을 경계하면서 부지런하고 검소한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부부간의 금실은 주남(周南) 소남(召南)의 풍화(風化)에 근본하였고, 아들을 낳은 경사가 있어 우리 왕가가 백세토록 번성을 누리게 되었다. 그런데 6월 10일에 천고(千古)에 없던 변고가 갑자기 일어나리라고 어찌 생각이나 했겠는가? 아! 우리 동방 예의의 풍속에서 어찌 이 지경에까지 창궐한단 말인가? 전에 없던 어렵고 위태로운 때를 당하여 놀랍고 통탄스러움을 차마 말할 수 없었고, 믿는 것은 신명(神明)이 보호해 주시는 것뿐이었다. 시일이 꽤 지나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할 길이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매우 다행스럽게도 중전은 당일 난을 당하였을 때 일시적으로 변란에 대처하는 방도를 깊이 진념하여 차분한 태도를 지녔으니, 이는 주역(周易)의 험난함을 무릅쓰고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에 부합되고, 자취를 남 몰래 안정시켰으니 그 의리는 논어(論語)의 일의 경중을 저울질하여 의리에 합하게 한다는 공자(孔子)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이다.

처음에 신료들이 누차 진달한 것으로 인하여 반신반의하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었는데, 나중에야 명성황후가 친당(親黨)에 우거(寓居)하고 있음을 알고는 그지없이 기뻤다. 이에 여러 사람들의 바라는 마음이 모두 똑같은 이상 맞이하여 환궁하는 일을 어찌 잠시라도 지체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 달 1일에는 명성황후인 중궁전(中宮殿)을 맞이하여 환궁하게 되었다. 겸손한 덕은 사가(私家)에 나가 있으면서도 자주 발로 되어 중전의 덕이 더욱 빛났고 건강도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으니 하늘이 복을 더욱 돈독히 내려주신 덕이다.자전(慈殿)의 근심스런 마음이 풀리시자 온화한 목소리로 기쁨을 올렸고, 세자는 애모하는 마음을 펴게 되어 채색 옷을 입고 주변을 감돌며 춤을 추었다. 위기를 전환하여 울음이 웃음으로 바뀌었으며 밝은 운수를 맞아 아무리 옛 것이라도 새로워졌다. 이미 묘(廟)와 궁(宮)에 공경히 고하였으니 조야(朝野)에도 널리 전하고 온 나라가 모두 기뻐하는 마음을 미루어 은혜를 널리 베풀 것이다. 백성들에게 스스로 날로 새로워질 방도를 깨우쳐주니 구습(舊習)의 때를 다 씻어야 할 것이다.이 달 7일 새벽 이전의 잡범(雜犯)으로서 사죄(死罪) 이하에 해당하는 자를 모두 용서하라.아! 한 사람에게 경사가 있으니 온 나라가 함께 기뻐해야 할 것이다. 임금과 백성이 서로 의지하여 큰 기업(基業)을 태산(泰山)이나 반석(磐石) 보다 튼튼히 하고, 우주가 길이 안정되게 하여 백성들이 태평 성세의 아름다움 속에 깃들게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교시(敎示)하니 잘 알아들었으리라 생각한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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