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 일화] 北 난민 14,000명 구한 기적의 미국 선박


수천명이 배에 탈 기회를 잡기 위해 줄에 늘어서 있다. Image copyrightUS MARINE CORPS ARCHIVES


[흥남항 폭파 등 BBC 제공 사진 더 보기]

  

: 로라 비커

 

입력 2019.12.24.

BBC 원문 3시간 전

 

[시사뷰타임즈] 거의 70년 전, 미국 상선 한 척이 북한의 한 항구에서 단번에 난민 14,000명 이상을 태워주었다. 이 기사는 그 여정에 관한 것이며 일부 사람들은 이 배에 승선했었다.

 

때는 1950년 성탄절 날이었고, 이건 보통의 출산이 아니었다.

 

엄마는 중국 인민군이 전진하는 총구에서 도망쳐 이 미국 상선에 콩나물시루처럼 타게된 북한 난민 14,000명 중 하나였다.

 

배에는 서있을 공간도 거의 없었으며 의료장비 또한 많지 않았다.

 

현재 69세 정도 되는 리경필은 내게 산파는 내 탯줄을 자신의 이빨로 끊었습니다라고 하면서 사람들은 내가 죽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가 성탄절 기적이라고 했습니다라고 했다.

 

리경필은 5번째 아이였으며 SS 메레디스 빅토리 호에서 그해 겨울 태어났는데, 한국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가장 암흑같은 날들 중 일부인 때였다.

 

메레디스 빅토리 호는 3일 동안의 항해에서 수천 명의 목숨을 구했는데, 이중에는 한국의 현직 대통령 문재인의 부모도 포함된다.

 

빅토리 호는 화물선이지만 기적의 배라는 별명도 얻었다.

 

대피

 

195012, 10만 명 정도 되는 유엔군이 북한 흥남 항구에 갇혔다. 유엔군은 조신의 전투라고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전투에서 중국 인민군에게 압도 당했고, 운좋게도 살아서 산을 빠져 나온 것이었다.

 

유엔군은 자신들보다 4배나 규모가 더 큰 군대와 맞닥뜨렸다. 그러나 이제 안전한 길은 딱 한 곳 밖에 없었는데, 바로 바다였다. 그리고 유엔군에겐 바다로 갈 시간이 거의 없었는데. 중공군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엔군 병사만 있는게 아니었다. 북한 난민 수천 명이 얼음짱 같은 바다로 도망쳤다. 많은 난민들이 구조되리라는 희망 속에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엄청나게 쌓인 눈속을 몇 마일이나 걸어온 것이었다.

 

난민들은 추위에 떨었고 지쳐있었으며 필사적이었다.

 

유엔군 병사들을 태우고, 보급품 및 탄약을 싣기 위해 빅토리 호를 포함하여 약 미국 선박 100척이 흥남 항으로 가서 이들을 데리고 한국의 부산항 및 거제도로 갔다.

 

난민을 구하는 것은 전혀 계획에도 없었던 것이었다.

 

미국 해양 기업의 데워드 포니 대령은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이들을 구하는 것도 임무의 일환이 되도록 노렸했다. 그의 손자 넷이 현재 서울에서 산다.

 

해병대 역전 용사이었던 넷은 내게 전쟁에서 이기고 싶으면, 민간인들을 구조하는 게 자신의 일이어선 안된다고 하면서 훌륭한 일이긴 하지만, 군대 일이 우선이기 떄문이다라고 했다.

 

넷은 어쨌거나 그냥 민간인 구조를 하게 됐다면서 흥남 항에 있던 난민들은 천사들과도 같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고 이치에 맞는 게 올하른 일을 어려운 상황임에도 했었다고 말하고 싶다고 했다.

 

배에 이들 모두를 태우는 데에 여러 날이 걸렸다. 난민들은 해안가로 서둘러와서 모인 뒤 자신의 차례가 되길 기다리고 바라며 있었다.

 

이들 중엔 당시 17살이었던 한보배()가 자신의 엄마와 있었다.

 

보배는 죽느냐 사느냐의 상황이었어요라고 하면서 우린 이 배에 타지 못하면 우린 죽는다는 생각 외엔 아무런 생각이 없었어요라고 했다.

 

우린 이 배가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그런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우린 이 배에 탈 수만 있다면 우린 살 수도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어요라고 했다.

 

그러나 고향을 떠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멀어져 가는 해변을 바라 보면서, 어린 마음에 슬퍼졌어요. 이제 난 떠나고 있는 거야, 라고 난 생각했지요

 

각각의 배 위의 상황은, 최소한으로 말을 해도, 힘들었다. 난민들이 차량들, 탄약 상자들 사이로 비집고 들이 갔어요

 

 

먹을 것이나 물도 없었다. 가장 덩치가 컸던 빅토리 호는 가장 많이 태우는게 승무원 60명 정도로 설계된 것이었다. 그런데 난민 14,000명을 태웠고 거기다가 화물도 있었다.

 

한보배는 한 작은 배의 갑판 위에 덩그러니 있었다. 엄마는 담요를 가져오려고 애를 썼지만, 거의 없었다.

 

우리 엄마, 여동생 그리고 난 함께 들러붙어 있었어요. 배 위엔 사람들이 아주 많았고 우린 모두 움직일 수 조차 없는 상태였어요

 

파도가 내게 소나기처럼 덮치곤 했고, 엄마는 우리가 익사하여 바다 귀신이 되는거 아닌가 우려를 했었지요

 

배에 타고 있는 사람들 중 죽은 사람은 없었다. 모두 20만 명이 이 위험스런 한국으로의 여정을 해냈는데, 이들 중 절반이 난민들이엇고 절반은 병사들이었는데 살아서 뭍에 당도한 것이었다.

 

이것은 미국 역사상 전투 상황에서 군이 민간인을 대피시킨 가장 대규모 바다 수송이었다.

 

그리고, 빅토리 호가 거제항에 닿았을 때 배 위엔 새로운 5명의 생명이 있었다.

 

미국 승무원들은 한국 이름은 단 한명도 알지 못했고, 그래서 그들은 아기들 각각을 김치라고 불렀다. 리경칠은 김치 5번이었다.

 

난 진짜 그 말이 실었습니다. 김치 5번이라나니요? 난 고유의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보면서, 신경 쓰지 않게 됐고 지금은 내게 그 이름을 지어준 사람에게 감사해 합니다

 

리경필은 빅토리 호가 거의 70년 전에 대려다 준 거제도에서 아직도 살고 있다. 그는 수의사가 됐고 그의 명함 위의 이름은 아직도 김치 5이다.

 

리경필은 흥남 대피 이야기가 살아있는 것이 되도록 옵고 있으며, 자신의 어머니의 출산을 도왔던 사람들을 비롯하여 빅토리 호 승무원이었던 사람들 중 일부를 만났다.

 

그는 언젠가 거제항에 빅토리 호 기념비를 세우길 바라고 있다.

 

이별

 

김치 2, 3 또는 4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배위에서 첫 번째로 태어난 아이 김치 1 -손양영이라고 더 잘 알려진- 의 부모는, 그들의 여생을 뒤따라다닐 가슴이 찢어지는 결정을 내렸다.

 

난민들 대부분은 자신들이 며칠 동안, 아니면 길어봤자 몇 주 정도만 다른 곳에 가있게 되는 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계획상으로는 늘 흥남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었지만, 되돌아 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손양영의 부모는 그 당시 이미 자식이 2명 있었다. 9살짜리 태영이와 5살짜리 동국이었다. 지독하게도 추웠었다. 항구는 대혼란에 빠져있었다.

 

손양영의 아버지는 임신 막달인 자신의 아내를 쳐다보면서, 아내도 매에 타야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식 2명을 삼촌에게 맡기고 아이들에게 곧 돌아올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그와 자식 두 명은 다시는 서로 보지 못했다. 전투가 중단되고 휴전 조약에 체결됐는데도, 한반도는 갈라져 있었다. 남과 북은 공식적으로는 아직도 전쟁 중이다.

 

여러 해 동안, 손양영의 엄마는 남편이 자식 2명을 도로 데려 오길 빌었지만, 이제 엄마는 자신이 불가능한 걸 요구하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

 

아침마다, 엄마는 정한수 한 그릇과 쌀을 자신의 잃어버린 자식들 앞에 공양물로 놓고 기도를 한다.

 

손양영의 아버지는 전 분단 가족이 지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의 살아있는 증거입니다라고 말한다.

 

저희 가족은 다시 헤어졌습니다. 전 제 자식이 있고 손주들이 있으며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마다 늘 아이들이 무탈한 지 점검합니다

 

전 아직도, 바로 똑같은 자궁에서 나온 다른 아기들은 부모와 분리되어 많은 일을 겪는 반면, 어떻게 한 아기가 자신이 부모들과 함께 있을 운을 지니는 것인지 이해하려하면서 상실감에 빠집니다.”

 

그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가 되돌아 오리라는 희망 속에 기다리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손양영의 아버지는 북한이 거의 허용하지 않는 이산 가족 만남이 될 수 있게끔 국제 적십자사에 자신의 형제 자매들을 보게 해달라고 신청했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들 모두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의망 속에 한반도가 통일 되기를 기원한다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그들이 살아있는 한, 난 그들을 찾을 겁니다라고 했다.

 

그는 우리들에게 남자 아기 사진 및 옆에 손으로 쓴 쪽지가 있는 것을 보여 주었다. 이 쪽지엔 네 큰형 태영이를 만날 때까지 이 사진을 잘 간수하거라라고 적혀있다.

 

흥남에서 한국으로 대피를 한 사람들의 후손이 약 1백 만명 가량 한국 및 세계 곳곳에 살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생존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뒤에 버려진 사람들의 깊은 슬픔도 있다.

 

미국인들이 성탄절 전야에 마지막으로 흥남 항을 떠나가면서. 해군소장 제임스 도일은 쌍안경으로 훑어보았다.


흥남 대피 당시의 일을 기록하기 위해 책을 쓰고 있는 넷 폴리는 그는 최소한 미국이 구조한 난민 수 만큼의 난민들이 해안가에 있는 것을 봤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미국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인들은 중공군이 남아있는 보급품이나 자산들을 어느 것이라도 가져가지 못하도록 항구 자체를 폭파시켜야 했다는 것이다.

 

한보배는 자신이 타고 있는 배에서 폭파 장면을 지켜봤고 불의 바다였다고 묘사했다. 폭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중공군이 흥남 마을에 진입했다.

 

한보배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항구에서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주 많은 사람들이 매에 오르지 못했습니다라고 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 사람들 비명횡사 했음이 틀림 없어요. 제 마음이 아픕니다. 대포, 폭탄,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손양영의 아버지는 여전히 자신의 가족이 살아있기를 바란다. 어쨌거나 자기 자신도 기적의 배 때문에 살았으니까. 이제 그는 한 가지 더 바라는게 있다. 자신의 형제 자매들에게 하는 말이다.

 

부모는 살아있는 동안 너희들이 매일 같이 보고 싶었다. 설령 부모가 하늘 나라에 있더라도 난 부모가 여전히 너히들을 찾을 것이라고 믿는다

 

난 우리의 꿈이 아주 가까운 미래에 실현되길 진정으로 바란다. 난 진정으로 바란다



The US Ship of Miracles that saved 14,000 North Korean refugees

 

By Laura Bicker

BBC News, Seoul

3 hours ago

 

Image copyrightLEE GYONG-P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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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e Gyong-pil, who was given the name Kimchi 5, was born on a cargo ship

 

Almost 70 years ago, a US merchant marine ship picked up more than 14,000 refugees in a single trip from a North Korean port. This is the story of that journey, and some of those on board.

 

It was Christmas Day in 1950, and this was no ordinary birth.

 

The mother was one of 14,000 North Korean refugees crammed into a US merchant marine ship, fleeing the advancing guns of the Chinese army.

 

There was barely enough room on board to stand - and there wasn't much medical equipment, either.

 

"The midwife had to use her teeth to cut my umbilical cord," Lee Gyong-pil tells me some 69 years on. "People said the fact that I didn't die and was born was a Christmas miracle."

 

Mr Lee was the fifth baby born on the SS Meredith Victory that winter, during some of the darkest days of the Korean War.

 

The Meredith Victory's three-day voyage saved thousands of lives, including the parents of the current President of South Korea, Moon Jae-in.

 

It also earned the cargo freighter a nickname - the Ship of Miracles.

 

Image copyrightLEE GYONG-P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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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mily of Kimchi 5

 

The evacuation

 

In December 1950, some 100,000 UN troops were trapped in the North Korean port of Hungnam. They had been overwhelmed by Chinese forces in what became known as the Battle of Chosin, and were lucky to make it out of the mountains alive.

 

They had faced an army almost four times their size. But now there was only one way to get to safety. By sea. And they had very little time to do it: the Chinese were closing in.

 

But the troops were not alone. Thousands of North Korean refugees had also fled to the freezing beach. Many had walked miles through deep snow with young children in the hope of being saved.

 

They were cold, exhausted and desperate.

 

Around 100 US ships, including the SS Meredith Victory, had sailed to Hungnam to pick up the troops, supplies and ammunition and take them to the South Korean ports of Busan and Geoje Island.

 

Rescuing refugees had never been part of the plan.

 

Image copyrightNATIONAL ARCHIVES 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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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ugees gathered at Hungnam in December 1950

 

Colonel Edward Forney of the US Marine Corps worked with others to try to make it part of the mission. His grandson Ned lives in Seoul.

 

"If you want to win a war - your job is not to rescue civilians," Ned, a marine veteran, tells me. "It's a nice thing to do. But the military does come first."

 

"Somehow it just happened," he explains. "These guys there at Hungnam listened to their better angels and did what I like to say was the right thing, for the right reasons, in a very difficult situation."

 

It took several days to get everyone aboard the ships. The refugees huddled together on the shoreline, waiting and hoping for their turn.

 

Among them was a then 17-year-old Han Bo-bae with her mother.

 

"It was a live or die situation," she says. "We didn't think of anything else other than we need to get on this ship or we will die.

 

"We didn't know where it was heading, but it didn't matter. We only knew that we might live if we get on the ship."

 

But leaving her hometown was difficult.

 

"Looking at the beach moving away from me, my young heart was saddened. I am leaving now, I thought."

 

Conditions on board each of the ships were, to say the least, difficult. Refugees were crammed between vehicles, boxes of ammunition and supplies.

 

There was no food or water. The biggest ship, the SS Meredith Victory, was designed to carry 60 crew at the most. Now it had 14,000 refugees - as well as the cargo.

 

Image copyrightAL FRANZ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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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hip, which was meant to hold cargo, found itself swarmed with people

 

Han Bo-bae was exposed on the deck of one small ship. Her mother managed to bring a blanket, but very little else.

 

"My mum, my younger sister and I were bundled up together. So many people were on the ship. We were all jammed.

 

"The waves would shower over me, and my mum was worried we were going to drown and become sea spirits."

 

No one died aboard the ships. All 200,000 who made that perilous journey to South Korea - around half of them refugees, half of them troops - reached land alive.

 

It was the largest sea-borne, military evacuation of civilians under combat conditions in American history.

 

And, as the SS Meredith Victory sailed into Geoje island harbour, there were five new lives on board.

 

Image copyrightUS MARINE CORPS ARCH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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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usands lined up for a chance to make it on to the ship

 

The US crewmen didn't know any Korean names, so they called each of the babies Kimchi. Mr Lee was Kimchi number 5.

 

"I didn't really like it at first. Because Kimchi 5? I have my own name. But when I thought of it deeply, I didn't mind it and now I thank the person who named me."

 

Mr Lee still lives on the island of Geoje where the Meredith Victory docked nearly 70 years. He became a vet and still has a business card with the name Kimchi 5 on it.

 

He helps keep the story of the Hungnam evacuation alive, and has met some of the former crew members of the Meredith Victory - including the one who helped his mother give birth.

 

He hopes one day to create a memorial to the ships in Geoje harbour.

 

Image caption

Lee Gyong-pil, aka Kimchi 5, today

 

The parting

 

No one knows what happened to Kimchi numbers 2, 3 or 4.

 

But the parents of the first baby born on board, Kimchi 1, better known as Sohn Yang-young, made a heartbreaking decision at Hungnam that would haunt them all their lives.

 

Most of the refugees thought they'd only be gone a few days - perhaps a few weeks at the most. The plan was always to return. But none of them did.

 

Sohn Yang-young's parents had two other children at that time. Taeyoung, aged 9, and Youngok, aged 5. It was bitterly cold. The port was in chaos.

 

Mr Sohn's father looked at his heavily pregnant wife and knew she had to get on board. He decided to leave his two other children with their uncle and reassured them that he'd be back in North Korea soon.

 

They never saw one another again. Even when the fighting stopped and an armistice was signed, the peninsula was divided. The two Koreas are officially still at war.

 

For years, Mr Sohn's mother begged her husband to go back for their children, and yet she knew she was asking the impossible.

 

Every morning she would take a bowl of sacred water and rice and pray in front of them as an offering for her lost children.

 

"I am living proof of the sorrow and pain a divided family carries," says Mr Sohn.

 

"My family was torn apart. I have my own kids and grandchildren now and I check every day when I return home from work if my kids are ok."

 

"I am still at a loss to understand how one baby had the luck of staying with his parents - while the other babies who came out of the exact same womb were separated from theirs and went through so much.

 

"They must have waited in hope their mum and dad would return."

 

Mr Sohn has applied through the International Red Cross to see his brother and sister as part of the rare meetings of separated families allowed by North Korea.

 

He cannot hold back tears as he tells us that he wishes for the peninsula to be unified in the hope he can see them again.

 

"As long as they are still alive, I will find them," he says.

 

He shows us a picture of him as a baby with a handwritten note attached. "Keep good care of this photo until you meet your big brother Taeyoung," the note from his father reads.

 

Image copyrightSOHN YANG-YOUNG

Image caption

Kimchi 1 as a baby

 

There are thought to be around a million descendents of the Hungnam evacuation living in South Korea and around the world. It is a story of survival. But there is deep sorrow too for those left behind.

 

As the Americans sailed away from Hungnam for the last time on Christmas Eve, Rear Admiral James Doyle looked through his binoculars.

 

"He saw at least as many refugees on the shore as the US had rescued," says Ned Forney, who is writing a book to document the evacuation.

 

But the US said it had no choice. They had to blow up the port to ensure the Chinese army would not take any remaining supplies or assets.

 

Han Bo-bae watched from the deck of her ship and described the port as a "sea of fire". Not long after the explosions, the Chinese army infiltrated the town.

 

"So many were still waiting at the port. So many couldn't make it to the ship," she tells us.

 

"There were still many waiting and they must have perished. It hurts my heart, the artilleries, the bombs. War shouldn't happen. War shouldn't happen."

 

Image copyrightUS NAVAL HISTORICAL CENTER

Image caption

Explosions on Hungnam beach

 

Mr Sohn still hopes his family is alive. After all, he himself came from the Ship of Miracles. Now he wishes for just one more, and has this message for his brother and sister.

 

"Our parents missed you every single day they were alive. Even though they're now in heaven I believe they're still looking for you.

 

"I do hope our dream will come true in the very near future. I do hope."

 

[기사/사진: 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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