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천호성지: 하늘이 부르는 성지···방대한 규모 및 그 다양함


 © SISAVIEW


위치: 전북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동 905-1

 

 입력 2018.1.23.

 

[시사뷰타임즈] 서울에 있는 천호동은, 이름을 지을 당시 집이 1천 호가 있어서 천호동이라고 했다는데, 천호 성지라는 말을 들으면서, 과연 한문으로 어떤 뜻인지가 궁금했었다. 이 성지가 있는 동 이름도 천호동이다.

 

天呼, 하늘 천에 부를 호 즉, 하늘이 부르는 성지라는 뜻이었다.

 

이 성지는 부지도 방대할 뿐 아니라 피정의 집을 겸한 성지이다. 우선 차를 타고 이 성지의 산자락 주차장에 도착해 보면, 바로 옆에 연못이 있는데, 성서에 나오는 실로암이라는 말이 붙은 실로암 연못이 있다.

 

여기서 10분에서 20분 정도를 걸어올라가면, ‘부활 성당이라는 곳이 있는데, 순례자들은 대개 이 성당에서 미사를 드린다. 부활 성당이어서 그런지, 예수님이 매달인 십자가는 형태가 여러 가지지만, 부활 십자가는 예수가 옷을 입은 채 하늘로 날아올라가는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인데, 바로 이 성당에 있는 십자가도 부활십자가이어서 예수님이 벗은게 아니라 옷을 입고 공중에 떠있는 형상이다.

 

천주교 성당은 외부의 모습이나 내부의 모습이나 각기 다양한 특성들을 지녔지만, 이 성당은 천장과 벽을 기하학적 모양의 삼각형을 잇대 만든 형태로 한 뒤 그 삼각형 안에 목재를 가로로 또는 경사지게하여 나란히 많이 붙여놓은 모습이어서 다른 성당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이 분위기 속에 청동제로 보이는 부활하는 예수님 상이 있다.

 

오전에 도착한 순례자들이 11시 오전 미사를 보고, 또 걸어올라가다 보면, 순례자 휴게실이 나온다. 커피 및 음료를 파는 자판기가 밖에 두 대 놓여있고 대형식당도 있다. 그리고 성물방이 있는데, 23일의 경우 날씨가 워낙 춥다보니 성물방엔 겨울철이어서 순례객들이 많이 오는 것이 아니다본티 사람이 상주할 수도 없고 하여 닫혀있었다.

 

또 조금더 울라가면 순교자 현양비라는 푯말이 보이는데, 계단을 타고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이 계단과 현양비가 있는 곳에 다 올라갔을 대의 현양피 앞 마당이 계단은 세로, 마당은 가로가 돼 공중에서 보면 거대한 십자가 형상이 된다.

 

여기서 좀 더 올라가면 우측으로 성물 박물관이 보이는데, 이곳에는 예로부터 만들었던 각종 성물이 진열돼 있고, 또 우리네 선조들이 어떤 십자가를 사용했었는지 진열장 속에 다양하게 전시돼 있으며, 대형십자가 중에는 실제로 예수가 발과 손에 피를 흘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십자가도 있다.

 

여기서 다시 또 언덕길을 꽤 올라가다 보면, 탁 트인 마당이 보이고 피정의 집이라는 간판도 보이며, 피정을 온 사람들이 미사를 드리는 소성당이 옆에 있고 순례객들은 이 피정의 집에서 식사를 하게 된다.

 

이 성지 밑자락에는 마을들이 있는데 대부분이 교우들이 사는 교우촌이고 또 성물제작 체험방이란 것도 있고 토마스 휴게실이란 곳도 있는 등, 대단히 넓고 다양하고 또 방대하다.

 

과거 이 성지에 화재가 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불이 번지고 불똥들이 정신없이 성지를 덮치려는 모습을 보면서 신부가 열심히 기도를 했더니, 역풍이 불면서 불길이 뒤쪽으로 번졌다는 기적 이야기가 있다.


 © SISAVIEW


 

고산 천호성지 (순교자들의 무덤)


가는방법 :완주군 비봉면 내월리 천호동 906-1

 

전주쪽 출발: 전주(전주역)에서 봉동읍을 거쳐 고산방향으로 4 Km 지점 어우리 삼거리에서 천호성지 안내표시대로 좌회전하여 11KM 곧장 가시면 됨

 

서울 쪽 출발: 익산 인터체인지에서 전주(봉동) 천호성지로 방향을 잡은신후 약800M 나오셔서 우리주유소앞에서 백제 예술 전문대 방향으로 좌회전 하여 천호성지 이정표를 보시고 계속 진행하시다가 비봉파출소에서 좌회전 하셔서 곧장 가시면 됩니다.

익산 인터체인지에서 천호성지까지 대략 9 Km 정도 됩니다.

 

 

 

 

천호성지 홈페이지 바로 가기 

 

문의 : (063)263-1004(사무실) 263-1005(FAX)

 

* 4성인의 묘 : 손선지(베드로), 정문호(바르톨로메오), 한재권(요셉)은 한 마을 출신으로 1866(丙寅)년에 숲정이에서 함께 처형된 후 전주천 건너 진북사 범바위 밑 도랑 가에 가매장되었다. 1867() 정월 그믐날 성 손선지의 큰아들 정회(요한)가 피신하여 있던 교우촌인 이 천호산으로 안장하였다.

 

그후 정문호와 한재권의 묘는 돌보는 이가 없어 망실되었다가 19835월의 발굴 작업으로 유해를 찾게 된 것이다. 또한 숲정이에서 치명, 진안 어은골에 모셔져 있던 이명서(베드로)의 묘가 이장되어 함께 모셔져 있다.

 

* 10인의 무명 순교자 : 이곳에는 손선지 외 7인의 합장묘가 있었다. 1983년 발굴한 결과 김영오(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8인이 묻혀 있었는데, 1868(戊辰)년 여산에서 치명한 후 다른 곳에 가매장되었다가 언젠가 누구에 의해 이곳으로 모셔진 것이다. 그외 2분은 구전에 의하여 천호산 기슭에서 발굴되었다. 이곳에는 현재 '천호 피정의 집''호남교회사연구소'가 자리하고 있다.

 

[] 천호성지와 성지의 조성과정

 

1. 천호성지

 

 

천호성지는, 150여 년의 전통을 가진 교우촌 천호(天呼) 공소의 천호산(天壺山) 기슭에 있다. 천호공소는, 그 이름처럼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이 하느님을 부르며 사는 신앙 공동체로서 존재하고 있고, 천호산 역시 이름 그대로 순교자의 피를 담은 병()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이곳에는 1866(고종 3, 병인박해) 12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성 이명서 베드로, 성 손선지 베드로,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성 한재권 요셉과 1866828일 충청도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열 분의 순교자가 묻혀 계시며, 이 분들과 함께 순교한 수많은 분들이 천호산에 종적을 알리지 않은 채 묻혀 계시다. 이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인간적인 모든 것, 곧 육신이며 이름이며 살아온 일생의 내력 그 어느 것 하나도 남김없이 하느님께 송두리채 바친 것이다.

 

천호산의 나무와 풀들은 이름과 종적을 알 수 없는 순교자들의 시신의 양분을 먹으며 자라고 있는 생명들이다.

 

2. 성지의 조성 과정

 

 

 

천호성지와 그 주변의 산은 본래 고흥 유씨 문중의 사유지로서 조선조 때 나라에서 고흥 유씨 문중에 하사한 사패지지(賜牌之地)였다. 이러한 남의 땅에서 사는 신도들은 산 자들의 집이건 죽은 자들의 무덤이건 언젠가는 쫓겨나야 할 처지였다. 그러던 중 1909년 뜻하지 않게 이 땅을 매입할 수 있는 기회가 와서 되재본당 목세영 신부를 중심으로 12명의 신도들이 어렵사리 돈을 마련하여 150 정보의 임야를 매입했다. 이렇게 해서 공소 신도들은 생활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미 모셔진 순교자들의 묘소들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1941년경 150 정보 중에서 순교자들의 묘와 종적은 알 수 없지만, 순교자들이 묻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땅 75 정보를 교회에 봉헌했다. 이 땅을 봉헌한 사람들은 목세영(베르몽)신부, 김여선(金汝先), 이만보(李萬甫), 장정운(張正云), 김현구(金顯九), 박준호(朴準鎬), 민감룡(閔甘龍), 송예용(宋禮用) 8명이며, 이로써 오늘의 성지를 보존하게 된 것이다.

 

전주교구 호남교회사연구소는 19835, 천호산에 묻힌 순교자들의 유해 발굴 작업을 하여 현재의 위치에서 그 동안 실전(失傳)되어 왔던 성 정문호와 성 한재권의 유해, 그리고 1868년 여산에서 치명한 후 합동으로 묻혀 있던 여덟 분의 유해와 천호산 기슭에서 두 분의 유해를 발굴하였다.

 

그러나 천호산에는 지금도 어디에 묻혔는지 알 수 없어 발굴하지 못하는 많은 순교자들이 계셔 우리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전주교구는 1984년부터 천호성지를 개발하여 19851130일 자치교구 설정 50주년 기념 선포일에 맞추어 성지를 축성하였고, 50주년 기념의 해인 1987년에는 전주교구민들이 선조들의 순교 정신을 이어받기 위한 신앙의 수련장으로 피정의 집을 세웠다.

 

이곳은 천호산 기슭에 형성되었던 박해시대 교우촌의 옛 터와 주변 환경이 손상되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어서 그 시대 교우촌의 입지적 특성을 보여 주는 교육장으로서도 가치가 있다.

 

[] 천호공소

 

1. 천호공소(다리실·용추네)

 

천호공소는 다리실 또는 용추네라는 다른 지명을 갖고 있는데, 박해시대에는 다리실 또는 용추네라고 불렀다. 다리실은 월곡(月谷)이라고도 썼으며, 용추네는 본래 용이 등천한 내()가 있다 해서 용천내라고 했는데 용추네는 용천내가 변한 이름이다. 천호(天呼)라는 행정명(行政名)은 후대에 교우마을이 형성되면서 용천내가 천호로 바뀐 듯하다.

 

천호마을이 형성된 것은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서 였는데 주로 충청도 신도들이 목숨을 보존하고 신앙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이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비롯되었다. 신도들이 처음 마을을 이룬 곳은 성인들의 묘지 맞은편 골짜기인 무능골이었다. 그리고 신앙의 자유가 주어진 후 골짜기 밑으로 마을을 이루었다가 다시 서서히 아래쪽으로 내려와 현재의 마을터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다리실과 성 손선지·성 한재권

 

천호 성지에 묻힌 순교 성인 중, 손선지 베드로와 한재권 요셉은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피신하여 유랑 생활을 하던 중 다리실에 잠시 살았던 적이 있으며,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로 옮겨 그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18661213일 손선지 성인이 처형된 후 그의 아들 손순화(요한)70여세 된 할머니 임 세실리아와 어머니 루시아와 동생들을 데리고 천호마을로 다시 피신해 왔다. 이 때 성 한재권과 성 정문호의 가족들은 무능골과 인접한 시목동으로 피신해 왔다.

 

3. 다리실 신앙공동체가 겪은 박해

 

1868(고종 5, 무진년)에는 다리실에도 박해의 손길이 뻗혔다. 그래서 69일 문회장, 이요한, 김치선, 김영문(요셉), 장윤경(야고버) 회장 등 천호 신도들이 여산으로 끌려 갔는데, 그 중 장윤경 회장은 1868101(양력 1114)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이 때 손선지 성인의 아들 마태오가 사망했는데, 그 사연은 이러하다.

 

다리실 신도들이 체포되던 날이었다. 손선지 성인의 아들 마태오는 병으로 앓아 누운지 스무날이나 되어 피신하지 못하고 집에 있다가 포교 일행에게 발각되었다. 그들은 마태오를 욱지르며 신도들이 도망간 곳을 대라고 하다가는 체포한 신도들의 압수한 재산을 가지고 여산관아로 갔다. 그날 밤 마태오의 큰형 요한은 환자가 걱정이 되어 집에 왔다가 환자로부터 포졸들이 남기고 간 말을 듣고는 환자인 마태오를 데리고 산 속으로 숨어들어 갔다. 그런데 마침 장마철이어서 찬비를 맞으며 3, 4일을 지내고 나니 병세가 극도로 악화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으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포졸들이 찾아 올 것이 두려워 자기 집으로는 가지 못하고 남의 집에 들어 갔다. 그러나 마태오는 불안해서 산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마음 뿐 다른 생각이 없었다. 요한은 환자가 무엇이든 먹어야 살 것 같아 음식을 주었지만 먹지를 못하더니 마침내 풍증(風症)으로 18686121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입전으로는 이런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환자가 몹시 앓고 있는데 포졸들이 다시 마을에 와서 집을 뒤지고 다니다가 환자와 요한이 숨어 있는 집 울안에까지 왔다. 환자는 고열의 고통을 못이겨 신음하고있던 터였다. 형 요한은 발각되는 날에는 숨을 곳이 들통나 떼죽음을 당할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환자의 신음소리가 새 나가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 씌워 누르고 있다가 포졸들이 떠난 후에 이불을 걷어 보니 질식해 숨져 있더라는 것이다.)

 

박해시대에 천호산 기슭에는 다리실(용추네=천호), 산수골, 으럼골, 낙수골, 불당골, 성채골, 시목동 등 7개의 공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리실, 성채골, 그리고 후대에 터를 옮겨 새로이 시작한 산수골 공소만이 남아 있는데 이들 공소 중 다리실 공소는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공소다. 1877년 한국천주교회에는 블랑 신부와 드게트 신부밖에 없었는데, 블랑 신부는 1877년 으럼골을 사목활동의 거점지로 하여 정착한 후, 리우빌 신부와 라푸르카드 신부 등 3명의 선교사가 10여년 동안 이곳으로 부임했다. 그러나 이들 선교사들이 주로 머문 곳은 천호공소였다.

 

오늘의 천호공소는 150여년의 전통을 지닌 교우촌 답게 주민 전체가 신도들로 구성되어 있다.

 

[] 성인들의 묘

 

1. 네 분 성인들

 

천호성지에 성 손선지 성 정문호, 성 한재권이 묻힌 것은 1867년이었다. 이 분들이 한 곳에 묻히게 된 것은 세 성인이 전북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서 거주하다가 함께 체포되고 같은 날 한 장소에서 처형되었을 뿐 아니라 생전의 친분 관계도 그랬지만 그들 가족이 천호마을로 피신해 살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고 이명서 성인은 세 성인들과 한 날 같은 장소에서 순교하셨지만 다른 곳에 묻혀 계시다가 1988년 이곳에 안장되었다.

 

손선지 성인과 정문호 성인은 충청도 임천의 동향인이다. 정문호 성인이 대성동 신리골에 살게된 것은 손선지 성인을 찾아갔기 때문이다. 또 한재권 성인은 충청도 진잠 사람이었는데 손선지 성인과 평소 친분이 있어서 그가 천호마을에 정착해 있는 것으로 알고 찾아갔었지만 대성동 신리골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다시 그곳으로 찾아가 살았던 것이다. 그리고 성인들이 처형된 후 손선지 성인의 가족이 천호마을로 피신하여 오자 정문호 성인과 한재권 성인의 가족들도 함께 왔는데, 이들 두 가족이 거처를 정한 곳은 천호마을과 인접해 있지만 천호와 다름없는 시목동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18661213일 전주 숲정이에서 한 날 한 시각에 처형된 분은 여섯 분이다. 그중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등 3명은 대성동 신리골에서 살고 있었고, 조화서, 조윤호, 이명서 정원지 등 4명은 신리골에서 남쪽으로 3가량 떨어진 전북 완주군 소양면 유상리 성지동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125일 두 마을 신도들이 체포되어 함께 전주로 압송되었다.

 

2. 고마운 은인 오사현

 

숲정이에서 처형된 분들의 시체를 거두어 준 사람은 향리(鄕吏) 신분인 오사현이라는 외교인이었다. 그는 성지동과 인접한 유상리에서 살고 있었는데, 성지동은 1840년대에 형성된 교우촌이었고, 대성동 신리골 역시 이 무렵 형성된 교우촌이었다. 그러나 오사현은 이 두 마

 

을이 신도들의 교우촌인줄을 모르고 지냈다. 성지동과 대성동 신리골에 사는 신도들은 담배 농사를 주업으로 하여 생계를 근근히 이어가는 터라서 가난하기 그지 없었다. 그런데도 일상 생활의 몸가짐은 누구나 본받을 만큼 모범적이었다.

 

오사현은 두 마을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면서 도대체 이 마을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내밀히 알아 본 결과 놀랍게도 나라가 금하고 있는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들이 비천하게 살면서도 훌륭한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그들이 믿는 종교가 참 인간됨을 가르치는 진리의 종교이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향리(鄕吏)의 신분으로 천주교도들을 관가에 고발해야 했지만 그러지를 않고, 오히려 자기도 언젠가는 천주교를 믿겠다고 내심 다짐하고는, 그들이 천주교도라는 사실을 숨겨 왔다. (그는 훗날 진안 서촌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입교한 후 착실히 수계범절을 하다가 선종했다.) 그리고 평소 성지동에 사는 조화서 성인과 각별한 친분을 맺고 지냈다.

 

오사현은 마음으로 아끼던 천주교도들이 전주 감영으로 끌려가자 마음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신도들을 구명하기 위해 전주 감영으로 찾아가 평소 친분이 있는 관원들을 만나서 그들이 살아 날 방도가 없을까 물었다. 관원들의 대답은 간단했다.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당장 풀어줄 뿐 아니라 압수한 재물도 돌려주겠는데 저들이 막무가내로 죽기를 고집하고 있다고 했다. 오사현은 신도들을 살려볼 요량으로 그들이 갇혀있는 옥으로 찾아갔다. 그리고 신도들에게 권고하기를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애쓰는 가족들의 심정을 생각해서라도 일단 배교하라고 했다. 그러나 신도들은 자기들의 구명을 위해 애쓰는 오사현의 인정에 고마워하면서도 배교 하라는 말을 하려거든 다시는 옥에 나타나지 말라고 완강하게 거절했다.

 

신도들은 옥중에 있는 동안 공동으로 기도를 바치고 교리를 토론했다. 이런 모습을 본 옥직이는, '빌어먹을 놈들 같으니 매일 그렇게 두들겨 맞고도 즐거워하니 도대체 네 놈들은 어떻게 된 놈들이냐' 하며 혀를 찼다. (입전에선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오사현은 옥으로 신도들을 찾아가 이런 충고를 했다고 한다. 가족들이 살아서 나오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으니, 우선 배교한다고 말하고 석방된 후에 다시 믿으면 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신도들은 오사현에게, '우리와 무관한 당신이 우리를 구명하려고 하는 마음은 잊을 수 없이 감사한 일인데, 만약 우리가 이렇게 고마운 당신에게 거짓말을 한다면 당신은 우리를 보고 배은망덕한 놈들이라고 욕하지 않겠소? 이처럼 사람은 진실한 사람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진실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어찌 생각으로나마 거짓말을 품을 수 있겠소' 하고는 딱 부러지게 거절했다는 것이다.)

 

오사현만 아니라 영장(營長)도 처형 직전까지 여러번 설득했지만, 신도들은 끝까지 유혹을 물리치고 체포된지 여드레만인 18661213일 참수당했다. 목격자 오순보의 말에 의하면 순교자들이 참수될 때 목에서 흰 피가 흘렀다고 한다.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두어 준 오사현과 그의 아들 오순보의 말은 이렇다. 순교자들이 처형되자 처형장에 있던 거지들이 시체의 옷을 벗겨 가려고 우루루 몰려 왔다. 오순보는 거지들을 쫓아내고 여섯 순교자의 머리를 한곳에 모았다. 그리고 관졸들의 양해를 얻어 잘려진 머리를 각자의 몸에 차례대로 맞추어 놓고 거적으로 덮어 주었다. 그 후 군인들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수직했다. 삼일 후 순교자 가족들은 돈을 걷어 오사현에게 주면서 순교자들의 시체를 장사지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오사현은 순교자들이 처형된 지 나흘만에 마포 여섯 필과 부들자리 열 개와 일꾼 열두 명을 사서 형장으로 갔다. 그리고 사형을 집행한 영장 이근섭과 교섭하여 장사지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그는 여섯 순교자의 시체를 거두어 장대(將臺. 군지휘소) 건너 범바위(현재 鎭北寺가 있는 곳) 아래 도랑가에다가 가매장을 했다. 그리고 각자의 무덤 앞에 순교자들이 형장으로 끌려 올때 달고 나왔던 명패를 세워 놓았다.

 

3. 손순화(요한)의 이장(移葬)

 

손순화는 성 손선지의 맏아들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처형되자 가족을 이끌고 다리실로 피신해 왔다. 그는 이곳에 지내면서 도랑가에 가매장된 아버지가 늘 마음에 걸렸다. 그는 자기 집에서 건너다 보이는 (현재의 무덤이 있는 곳) 산에 아버지를 모신다면 항상 지켜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묘 자리로서도 손색이 없는 땅이어서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고 여겼다. 그런 생각이 들자 더 미룰 수 없었다. 그는 매제인 한정률(혹 경영 요한. 그는 처이자 손선지 성인의 딸인 손 막달레나와 함께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함), 정문호 성인과 한재권 성인의 가족, 그리고 신도들과 함께 1867년 정월 그믐 날(양력 1867. 3. 5) 시체를 반장(返葬)할 채비를 하고 가매장터로 갔다. 그러나 막상 현장에 도착해서는 마음이 불안하고 떨렸다.

 

4. 빛의 도움

 

그 날은 날씨가 청명했다. 가매장 터는 숲정이에서 빤히 쳐다보이는 곳이었다. 숲정이는 군인들의 연무장이었으며 지휘소가 있었다. 1801년부터 이곳에서 천주교도들의 사형이 집행되어 왔다. 손순화 일행은 가무덤 앞에 당도하긴 했어도 당장 연무장의 지휘소에서 군인들이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안개가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짙게끼었다. 뿐만 아니라, 이상한 붉은 빛이 순교자들의 무덤만을 비추어 주었다. 이 빛의 도움으로 각 무덤 앞에 세워 놓은 명패를 분간 할 수 있어서 염습하는데 어렵지 않았다. 무사히 염습을 마친 일행이 시체를 메고 얼마만큼 와서 위험한 지경을 벗어나자 다시 하늘이 맑게 개었다. 일행들은 이런 일을 보고 천주의 영적이라 감탄했다.

 

손선지 성인의 시체는 다리실(현재의 위치)에 장사하고 정문호 성인과 한재권 성인의 시체는 시목동에 장사하였다. (손순화의 증언 기록에는 시목동에 장사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한재권 성인의 후손들은 다리실이라고 말할 뿐 아니라 현재의 위치로 성묘를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아도 정문호 성인이나 한재권 성인의 가족들은 훗날 손선지 성인의 곁으로 이 분들을 옮겨 모셨다.

 

오사현의 증언 기록은 위의 상황을 이렇게 보충해 주고 있다. 그는 18672(음력) 조 베드로, 이명서, 정원지 세 분의 시체를 그 자손과 함께 가서 이장하여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 위에 장사하였고,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의 시체는 그 자손이 먼저 이장하여 갔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 정문호와 성 한재권의 무덤은 가족들이 오랫동안 돌보지 못하여 결국 봉분의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5. 병인년 순교자 분묘 조사와 발굴 작업

 

1922년부터 1923년에 걸쳐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병인년(1866) 한국 순교자들 중 시복 대상자들에 대한 조사가 있었다. 이 조사는 교황청 조사위원회의 위임을 받은 서울교구 보좌 주교인 드브레드() 주교가 맡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전주 지방의 조사는 전동본당의 라크루() 신부가 주관하고 서기에는 김 도마를 임명했다. 이 작업은 19236-8, 2개월에 걸쳐 실시되었다.

 

1923611일 오전 8시경이었다. 서울 교구 드브레드() 보좌주교, 전동본당 라크루 주임신부, 서기 김 도마, 다리실 공소 교우들, 김 베드로 회장, 김 방지거, 이 도마, 박 필립보, 김 마리아, 이 다두, 장 야고버, 송 라파엘 등 조사단 일행이 다리실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조사 작업을 하면서 분묘들의 위치를 표시한 도면을 작성하였는데 여기에 네 개의 분묘를 그려 놓았다. 그리고 시복조사 심의 중 증인들의 증언을 참작해서 네 무덤을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 정원지의 무덤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조사단의 추측은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쉽게 판명된다. 그 이유는 첫째, 정원지는 이곳에 묻혀 있지 않다. 그 증거로 정원지의 시체를 거두어 주고, 또 유상리 막고개로 이장해 준 오사현의 말을 살펴 보자.

 

그는 순교자들이 처형된 지 나흘 후 마포 여섯 필과 부들자리 열 두 개를 사고 일꾼 12명을 사서 여섯 시체를 거두어 장대(將臺, 숲정이) 건너 부응바위 아래 도랑 가에 묻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672, 조화서, 이명서, 정원지 등의 세 시체를 순교자들의 가족과 함께 가서 이장하여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장사했는데, 손선지, 정문호, 한재권의 시체는 그 가족들이 이장하여 갔더라는 것이다.

 

따라서 정원지는 제외되어야 마땅하다. 물론 훗날 정원지의 가족들이 다리실로 이장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없다. 둘째로는, 다른 한 개의 무덤은 1868년 여산에서 처형된 일곱 분(사실은 여덟분)의 합동 무덤인 것이다. 이 무덤을 증언한 사람은 김영문(요셉)인데, 그는 다리실에서 살다가 186869일 여산으로 끌려 갔었으나 용케 풀려 나왔었다. 그래서 그의 증언과 순교자 김성화 가족들의 증언을 근거로 하여 이 합동 무덤을 '김성화(야고버) 6인의 무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래서 네 무덤은 손선지, 7인의 합동 묘, 정문호, 한재권의 무덤으로 정리된다.

 

전주교구 김진소 신부는 1923611일 이 현장에서 작성된 문서를 한국교회사연구소로부터 입수하여 197711월에 현장을 답사하고 그 후 수 차례에 걸쳐 현장을 조사했다. 그리고 호남교회사연구소 주관으로 198359일부터 5일에 걸쳐 현장에서 발굴 작업을 착수했는데, 유해들은 도면에 표시된 장소에 정확히 묻혀 있었다.

 

이 유해들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과 전북대학교 의과대학 및 치과대학에서 5개월에 걸쳐 법의학적인 검사를 가졌으며, 이 검사 결과는 다시 교회사학자들의 문헌적인 검토를 거쳐 두 유해들의 주인공은 성 정문호와 성 한재권의 유해로 확정을 내리었다.

 

6. 성 이명서의 유해

 

성 이명서는 오사현의 주선으로 1867218(양력 3. 23) 조화서, 정원지와 함께 완주군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묻히었다. 그 후 손자인 이준명(아나돌)은 진안군 진안면 어은동 모시골에 자기 소유의 산을 마련하여 1920322일 그곳으로 이장하였다. 그런데 1968년 시복되던 해에 한국 순교자현양위원회에 의해 발굴되어 서울 절두산 순교자기념관에 안치되었다. 그러다가 1984년에 다시 전주교구로 모셔와 보관하고 있다가 1988101일 이곳에 안장하었다.

 

7. 무덤의 배열

 

이곳 성지에 묻힌 순교자들의 무덤 중에서 성인들의 무덤은 본래 발굴된 곳에서 몇 뼘의 위치만 바뀌었을 뿐 거의 같은 장소에 안장했다. 그리고 당시의 상황을 남기기 위해 발굴한 장소에 표석을 심어 놓았다.

 

그러나 실명(失名)된 순교자들의 무덤은 먼저 8인의 무덤으로 발굴된 순교자들에게 번호를 부여하였다. 순교자 김영오가 묻힌 곳에서 우측으로 1번부터 8번까지는 일명 8인의 순교자 무덤에서 발굴된 분들을 안치했고, 9번째는 방아골에서, 10번째는 현재의 십자가 탑 아래쪽에서 발굴된 분을 안치했다.

 

그런데 11번째의 무덤은 가무덤이다. 그 사연은 이러하다.

 

19835월 천호산에서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굴할 때 이곳 천호공소의 노령의 신도들로부터 이러한 증언을 들었다. 현재의 피정의 집 뒷편으로 산수골로 넘어가는 고개의 우측 산 날에는 옛부터 순교자의 무덤으로 전해 오는 묘가 봉분이 거의 없어진 상태로 있었다. 천호공소 회장은, (1983년의 5월의 말로) 20년 전까지 그 무덤의 사초를 맡아 왔었던 이전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그 무덤에는 여자 순교자가 묻힌 것으로 알려져 왔다고 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을 가정해 본다면 고산 산수골에 살다가 186810월 여산에서 순교한 박성진의 아내라고 불렸던 분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래서 여러 해를 사초해 온 천호공소의 이종권 회장과 노인 신도들과 함께 현장을 찾아갔더니, 순교자의 무덤 자리에 엉뚱하게 낯모르는 묘가 쓰여져 있었다. 그러나 무덤에 어떤 표석이나 분간할 만한 표시를 해 놓았던 것도 아니고, 또 무덤을 관리한지도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으니, 누구도 묘의 위치를 자신 있게 말하지 못했다. 그러한 새 묘가 조성된 데에는 이런 저런 말이 있었지만 확실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어서 참고하기로 하고 발굴작업을 중단하고 말았다.

 

그러나 차후 발굴될 경우를 생각해서 우선 가무덤을 조성해 놓았다.

 

[] 여산에서의 순교

 

1. 여산의 사형 집행

 

1868(무진년) 여산에서 천주교 신도들의 사형이 집행된 것은 사법권을 가진 부사와 영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산(礪山)은 왕후(王后)의 외향(外鄕)이며 성향(姓鄕)이었다. 이 고을 출신 송선(宋璿)의 딸은 여흥부원군(礪興府院君) 민제(閔薺)와 결혼하여 딸을 낳았는데 이 딸이 태종(太宗)의 비()인 원경 왕후(元敬王后)가 되었다. 그래서 왕후의 외가 고향이라 하여 세종 18(1436) ()을 군()으로 승격시켰고, 숙종 25(1699)에는 부()로 승격시켰다. 또한 여산은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며 단종(端宗)의 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성향(姓鄕)인 것이다. 이러한 왕후들과 관련되어 부()로 승격되었다.

 

또한 여산에는 전라도 다섯 진영장(鎭營將) 중 후영장(後營將)이 있었다.

 

2. 1868(무진년) 여산의 순교자들

 

1868년 여산에서는 교수형, 참수형, 백지사형으로 많은 수의 신도들이 치명했다. 신도들은 옥과 숲정이와 장터에서 처형되었는데 기록상으로 알 수 있는 숫자는 25명이다. 이들의 거주지를 보면,

 

고산 넓은바위의 김성첨(토마스. 62), 김명언(안드레아. 62), 김정규(야고버. 47), 김정언(베드로. 23), 김흥칠(마티아 혹 필립보. 19), 김 마리아(혹 베드로. 19) 등 한 가족 6명을 포함하여 오윤집 (타데오. 39), 박 베드로(40), 이 필립보(19), 김성화(야고버. 52), 이서방(영명과 나이 미상), 박 도미니코(이름과 나이 미상), 김찬여(요한), 박성실(요한), 이 요한(이름과 나이 미상), 오 유리안나 등 16.

 

고산 다리실의 장윤경 (야고버. 37)1.

 

고산 산수골(시목동)의 전 마리아(혹 데레사. 35), 박성진의 아내(이름과 나이 미상) 2.

 

용담 머리골의 송 가롤로(50), 박운겸(나이 미상) 2.

 

금산 흥동리의 김윤문(나이 미상) 1.

 

금산 개직리의 한경영(혹 정률 요한. 27), 손 막달레나(27) 2.

 

진산의 전 루시아(35) 1.

 

3. 순교 일화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사람들은 문서에서 확인된 숫자만 25명이나 되었으나 틀림없이 이 숫자보다는 더 될 것이다.

 

순교자들에 대하여 이런 입전이 전해지고 있다. 비록 낙수(落穗) 같은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흘려 버릴 수 없는 일화이다.

 

어느 날인가 8명이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는데, 그중 1명이 배교하는 일이 있었다. 사형이 집행되기 전날 밤이었다. 옥사장이 단꿈을 꾸는데 하늘에서 배교하지 않은 일곱 사람에게는 화관을 씌워 주고 한 사람에게는 화관을 씌웠다 벗겼다 했다. 그래서 옥사장은 그 까닭을 물었더니 배교자가 있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꿈에서 깬 옥사장은 배교자 대신 치명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서 일곱 사람과 함께 치명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입전의 사실 여부가 어찌 되었건 이 입전을 소중히 간직하여 전해 주려는 신도들의 숨은 뜻은 이렇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옥사장이 결단을 내리게 된 동기는 신도들이 옥중에서 보여준 금석 같은 신앙과 표양을 보고 양심의 눈을 부비고 뜬 것이리라. 그리고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보여준 초연한 행동에는 무엇인지 모를 깊은 뜻과 고귀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옥사 장은 천주교 신앙으로 전향하고 신앙을 고백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다.

 

입전자들의 내심에는 순교만큼 인간을 감동시키는 일도 없으며, 순교는 큰 전교였다는 것을 꼭 전해 주고 싶었을 것이다. 또한 순교는 천상에서 가장 큰 영광이지만 만일 하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인간이 자기 힘만으로 이룩하기에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허락하신다면 신앙의 연륜이 길건 짧건 관계없이 순교가 가능하며, 순교는 인간의 결단과 하늘의 승낙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일러주려는 마음이었으리라.

 

4. 순교하기까지의 참상

 

순교자들이 옥중생활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은 굶주림이었다. 신도들의 굶주림이 얼마나 참혹했기에 오죽해야 옥사장까지 동정심이 발동했을까. 옥사장은 신도들에게 바가지를 주면서 옥 밖으로 나가 동냥을 해 먹고 오라고 했겠는가. 그러나 빌어먹을 만한 곳도 변변치 못한 고을이었던가 보다. 그래서 빈 바가지를 들고 들어오는 죄수 신도들을 보고 하는 말이 바가지를 주며 내 보낼 때는 도망가라는 말인데 바보같이 왜 들어오느냐고 호통을 쳤다. 신도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는 위주치명(爲主致命)하기 위해 다시 들어 왔다."

 

신도들의 처형일은 어김없이 장날이었다. 옛 옥터가 있던 지금의 배다리 옆에는 미나리꽝이 있었고 그 부근에서는 장이 섰다. 천주교를 믿으면 이렇게 참혹하게 죽게 된다는 선전의 장소로 장꾼들이 볼 수 있는 곳보다 더좋은 장소도 없었다. 사형을 집행하기 전 처형당할 신도들을 풀어놓자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그들은 눈에 보이는 풀들을 정신없이 뜯어먹었다.

 

형관들은 순교자들을 처형한 후 미나리꽝에다가 집어던졌다. 그래서 신도들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야음을 틈타 목숨을 걸고 건져내었다. 그런데 순교자들의 옷을 벗겨 보니 솜을 두텁게 넣어 입었던 옷 속에 솜이 하나도 없었다. 배가 고파서 솜을 다 뽑아 먹었던 것이다.

 

5. 천호산에 묻히기까지

 

순교자들의 시체를 거둔 신도들은 이분들을 묻을 장소로 천호산을 택했다. 천호산에는 이미 1년 전에 전주에서 치명하신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여산의 순교자들도 당연히 그분들의 옆에 모셔야 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순교자들은 야음에 천호산으로 짊어지고 와서 묻었지만 어떤 순교자들은 다급한 나머지 적당한 곳에 가매장했다가 훗날 전주의 순교자들 곁에 묻었다.

 

이러한 사실은 19835월에 묘지를 발굴했을 때 일명 방아골에서 한 분, 현재 성지에 서 있는 십자가 아래 부분에서 한 분, 그리고 김성화(야고버) 외 여섯 분으로 알려진 무덤들에서 드러났다.

 

특히 김성화 등 7인의 무덤으로 알려져 왔던 무덤을 발굴했을 때 이러한 현상이 드러났다. 첫째, 이 무덤에는 7인의 아니라 8인이 묻혀 있었고, 둘째, 유해의 안치된 모습은 각자의 두개골 밑에 신체의 뼈들을 추려서 마치 장작 다발을 놓듯이 다북다북 놓은 상태였다. 이것은 다른 곳에 묻혀 있다가 육탈된 후 이곳으로 이장했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얼굴 쪽이 하늘을 바라보도록 놓여진 것이 아니라 땅에 엎어져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역적의 죄명으로 죽은 사람들의 무덤에서 종종 볼 수 있는 것으로, 역적은 백성의 하늘인 왕의 명령을 거스리고 죽었다 하여 죽어서도 하늘을 볼 수 없으므로 얼굴을 땅에 엎어놓는 관습을 따른 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으로 시체를 옮긴 사람들이 천주교 신도였을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천호성지에 묻혀 있는 무명 순교자들은 넓은 바위 출신의 김성첨 가족 6명과 같은 마을의 신도들로 보아도 과히 틀림이 없을 것이다.

 

[] 고산 지방의 교우촌

 

1. 저구리 신앙공동체

 

고산지방에 신도들이 살게 된 것은 1791(신해박해) 진산(珍山)사건이 끝나고서였다. 진산에 살던 양반인 윤지충(尹持忠)은 유교식 조상 제사 의식을 거부하고 천주교식 제사 의식을 따랐다 하여 1791128일 전주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집안이 폐족이 되자 지충의 아우 윤지헌(尹持憲)은 고향을 떠나 전북 완주군 운주면 저구리로 피신해 살았다 (흔히 운주면, 화산면, 비봉면, 고산면 등을 통칭하여 교회에서는 고산지방이라 부른다). 그 후 충청도 내포지방 신도들이 저구리로 이주하여 왔다. 우리가 알 수 있는 이 무렵의 신도들로는 이존창, 김유산, 김강이, 그의 아우 창귀 등을 들 수 있다. 17954월 중순()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주신부는 이들에게 성사를 베풀었다.

 

1801년 이후 세상이 조금 평온해지자 전국에서 신도들이 전라도를 피난지로 하여 몰려왔다. 이러한 현상으로 고산 지방에 교우촌이 본격적으로 형성되었고, 박해가 거듭될수록 이 지방에는 교우촌이 증가될 뿐더러 또한 이 지방에서 체포되는 신도 수도 많아질 수 밖에 없었다.

 

<택리지(擇里志)>의 기록대로 고산지방은 산수가 험난하여 사람이 살만한 곳이 못되었다. 그러나 풍진 세상에서 잠적하여 심신을 기르는 데는 이만한 곳이 없었다. 아무튼 교회 문서의 기록만 보아도 박해시대에 고산지방에 생긴 교우촌이 57개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 고을에는 심산유곡의 어디에나 신도들이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2. 넓은바위(廣岩. 넙바위) 교우촌

 

여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주거지 가운데 가장 기억해야 할 교우촌은 넓은 바위이다. 대아리 저수지에서 동쪽으로 5쯤 협곡을 따라 산천리, 왕재, 은천리를 지나면, 산에 묻힌 골짜기에 지금은 흔적마저 찾기 어렵지만 유서 깊은 넓은바위 교우 마을이 있었다. 이곳에 교우마을이 생긴 것이 언제부터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어도, 일찍이 고산 관아에 천주도교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1866(병인년)1월 여러 신도들이 체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서 상당히 오래된 교우촌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곳 신도들의 출신지는 대개 경상남도, 충청남도, 충청북도 등이었다.

 

이 교우촌이 겪은 가장 큰 박해는 1868(무진년)에 있었다. 이 때 이 마을에서는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심지어 젖먹이를 둔 여인까지 수십 명이 여산으로 끌려가 그 중 16명이 순교했다. 이들 순교자들 중에서 지도적인 인물은 김성첨(토마스)였는데, 그의 약전을 소개하면 이러하다.

 

그의 본관은 선산 김씨이며 함양 출신으로 언젠가는 알 수 없어도 넓은바위로 이사하여 살았다. 그러던 중 18661월 고산 관아의 포졸들이 이곳을 수색하여 신도들을 체포해 갈 때 그의 사촌인 김 프란치스코를 대신해서 끌려갔다가 석방되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1868910일이었다. 여산 포교 일행 28명이 넓은바위를 덮쳐 그를 체포하려 하자 그는, 여산 포교들은 해당 고을의 사법권이 없다 하며 완강하게 저항하므로 포교들은 할 수 없이 물러 갔다. 그런지 4일 후 여산 포교들은 고산 포교들을 앞세우고 다시 찾아와 그를 체포하여 고산 관아로 끌고 갔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고, 고산 주민들에게도 김성첨은 알려진 인물이었다. 고산 현감은 김성첨에게 나라에서 금한 천주학을 믿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친 죄상을 꾸짖으며 개과하여 배교한다면 여산부사에게 상신하여 석방해 주겠노라고 타일렀다. 그러나 김성첨은 만번 죽을지라도 배교는 천만부당한 일이라면서 여산 부사에게 이첩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여산은 고산과 진산을 관장하였고 영장(營將)이 있어 형을 집행할 수 있었다.

 

김성첨은 다른 10명의 신도들과 여산으로 압송되어 와서 영장으로부터 심문을 받게 되었다. 영장은 사학(邪學)의 괴수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천주학을 가르쳤으며, 마을에서 발견된 천주학의 서적과 상본들은 모두 네가 준 것이 사실이며 그 출처를 밝히라고 닥달했다.

 

그는, 본래 대대로 내려오는 천주교 가정이어서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고, 부모가 돌아 가신지 오래되어 그 출처는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러자 신도 일당을 불라 하면서 혹독하게 형벌하는 바람에 자기와 함께 끌려온 신도가 전부라고 둘러댔다. 그러나 영장은 더욱 분노하며 혹독하게 형벌을 내렸지만, 얼굴빛 하나 변하기는커녕 태연자약 하자, 초죽음이 되도록 매질을 해서 옥에 가두었다.

 

옥에 갇힌 신도 죄수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무엇보다 굶주림이었다. 그들의 집에 남은 가족들은 너무 가난해서 옥바라지를 해 줄 처지가 못되었다. 그런데 김성첨과 함께 갇힌 신도들 중 다섯 명은 그의 종질과 재종손이었다. 김성첨과 함께 일가족 6명이 옥고를 치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혹형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며 신음하는 신도들에게 위로하기를, "우리가 (치명할) 이 때를 기다렸는데 천당진복을 누리려 하는 사람이 이만한 고통도 참아 받지 못하겠느냐. 부디 감심으로 참아받으라."하며 격려했다.

 

김성첨은 신도들과 함께 아침저녁 기도 등을 공동으로 합송하며 기도의 힘으로 고통을 견디었다. 신도들에게 옥은 형벌의 장소가 아니라 신앙의 수련장이었다. 이러한 신도들의 기도생활을 보고 옥을 지키던 군인들은 능욕하기를, "저놈들은 죽어 가는 주제에 무엇이 즐거워 배가 고픈 줄 모르고 천주학만 한다."하며 비아냥거렸다.

 

김성첨과 함께 끌려간 신도들은 그해 1021(양력 12. 4) 교수형으로 처형되었으나, 김성첨은 그의 종손 마티아와 함께 1110(양력 12. 23) 교수형을 받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2(어떤 기록은 57)였다.

 

[] 순교 성인들의 약전

 

1. 성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일명 기식(基植)이라고도 하며, 1800년경 충청남도 임천에서 태어났다. 그가 입교한 데는 손선지의 영향을 입은 듯하다. 그는 한때 고을 원님을 지낸 적이 있는데, 입교한 후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신앙생활에 독신했다. 그는 박해가 일어나자 고향을 떠나 유랑생활을 하다가 동향인이며 그의 신앙에 영향을 끼쳤던 손선지가 정착하고 있던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을 찾아가 그곳에 자리잡고 살았다. 그는 양반 신분답게 행동이 점잖고 인격이 훌륭했다. 그리고 마음이 온화하며 예의범절이 발라서 사람들에게 좋은 표양을 보여 주어 존경을 받았다. 그는 외교인에게나 신도에게나 교리를 설명할 때는 학식이 많아 소상하게 잘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수계생활도 진실하게 했다.

 

1866(병인년) 늦가을이었다. 한동안 박해가 고개를 숙이는가 했더니, 다시 극성을 부린다는 풍문이 들려왔다. 그래서 정문호는 평소 친분이 있는 향리(鄕吏)인 오사현이 형방(刑房)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기에 그에게 전주 감영의 분위기를 알아보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소식도 오기 전 포교 일행이 들이닥쳤다. 125일 저녁이었다. 전주 포교들은 담배를 사러 온 사람처럼 가장하고는 정문호의 집에 와서 주인을 찾았다. 그때 신리골 신도들은 담배 농사가 주업이었다. 그래서 정문호가 문을 열고 나오자 포교 일행은 당신이 천주교 신자라는 신고를 받고 왔다면서 체포했다. 그리고 손선지, 한재권과 함께 구진퍼리(지금의 화심)의 주막까지 왔다. 여기에는 이들보다 앞서 잡혀 온 성지동의 조화서, 조윤호 부자(父子), 이명서, 정원지 등 성지동 신도들이 있었다.

 

이때 신도들을 체포하러 나선 포교 일행은 김재풍, 노덕수, 유이권, 강주봉 등 포교 4명과 포졸 8명이었다.

 

포교 일행은 붙들어 온 신도들에게 천주교를 가르쳐준 선생과 신도 일당과 친인척을 대라고 다그쳤으나 선선히 대답할 리가 만무했다. 그들 일행은 하루 밤을 주막에서 지내고 이튿날 전주 진영으로 압송되었다. 신도들은 끌려오면서도 불안하거나 초조한 기색이 없이 오히

 

려 희색이 만연했다. 신도들은 전주부중으로 끌려와 진영 앞 구류간에 갇혔다. 정문호는 수감된 지 3일되는 날 석양에 영장 이근섭으로부터 첫 신문을 받았다. 영장은 신도들에게 숨겨둔 책과 성물을 내놓으라 하며 신도 일당을 대라면서 삼경이 되도록 지독한 고문을 했다. 칠십 노구인 정문호는 3차에 걸쳐 심문을 받는 동안 혹독한 고문에 못이겨 순간이나마 마음이 흔들려 배교할까 했다. 그러나 조화서의 열심을 내어 치명하자는 권고와 격려를 받고, 이내 마음을 고쳐먹고는 치명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리고 영장에게 하느님을 배반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결심했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그는 열심히 기도를 바치면서 마음의 평온과 기쁨을 잃지 않았다.

 

1213일 처형날이 왔다. 그는 감옥을 나오면서 형장으로 감을 뻔히 아는데도 얼굴에 희색이 만연한 채 열심히 기도만 계속 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군인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형장으로 걸어가면서 동료들에게 "우리가 오늘 천당 과거시험을 보러가고 있으니 오늘이야말로 기쁘고 즐거운 날이요."하고 말하자 일행들도 그 말에 맞소리쳤다. 양반 신분인 정문호는 지난날 양반의 꿈인 과거 시험을 치르러 과거 길을 갈 때의 감격과 설레임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래서 순교의 길을 그처럼 비유했던 것이다.

 

죄수 일행은 사형장인 서문 밖 장대(將臺. 연무장)에 도착했다. 영장 이근섭은 마지막 심문을 하고 죄수들에게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받고는 사형을 집행했다. 죄수들의 상투에는 죄목과 이름이 적힌 명패가 매달려 있었다. 정문호는 자기 차례가 되어 희광이가 목을 잘 칠 수 있도록 목침을 괴었다. 희광이가 칼을 내리쳤지만 칼이 빗나가자 정문호는 고개를 들고 희광이를 바라보며 어찌하여 단칼에 목을 치지 못하느냐고 호령을 했다. 그리고 세번째 칼에 목이 잘렸다. 다른 동료 순교자들의 목에서처럼 그의 잘려진 목에서도 횐 피가 흘렀다. 그때 정문호의 나이를 오사현은 70, 오사현의 아들 오순보는 65, 치명일기66세라고 하였다.

 

2. 성 손선지(孫善智. 베드로)

 

그는 밀양 손씨 판서공파(判書公派)의 후손이며, 일명 성운(成云)이라 불렀다. 그는 아버지 손달원(이냐시오)과 어머니 임 세실리아로 부터 1820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夫餘郡 忠化面 支石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태생지를 흔히 괴인돌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곳에 지석묘가 있는 까닭이다. 그는 태중 교우는 아니었지만 어려서 영세하여 아버지 밑에서 직접 교리교육을 받으며 신심을 키워 나갔다. 그는 1837년 나이 불과 17세에 1839년에 순교한 샤스탕() 신부로부터 전교회장직을 임명받았다. 이런 사실을 미루어 보아 그의 사람됨이며 신앙의 정도를 가히 짐작할 만하다.

 

그는 김 루시아와 결혼했으며 1839(기해) 박해가 일어나자 충남 진잠 장안리로 피신해 살던 중 거기서 장남인 손순화(요한)을 낳았다. 그 후 전라도로 와서 여러 곳을 배회하던 중 완주군 비봉면 다리실(현재의 천호동)에 살았던 적이 있으나,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에 정착하여 담배 농사를 주업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이곳에서도 전교회장으로 활약했으며, 그의 집은 공소집으로 사용했다.

 

1866년 가을 추수가 시작되자 박해가 수그러드는 듯 하더니 그것도 잠시였다. 어느 날 나무꾼 몇이서 손선지의 집 앞을 지나가며 자기들끼리 하는 말이 이 마을이 머지 않아 쑥밭이 되리라는 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1866125일이었다. 저녁 때 인데 밖에서 담배를 사러 온 사람이 주인을 찾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 문을 열어 보니 담배를 사려고 온 사람들이 아니라 전주 감영에서 나온 포교들이었다. 그는 먼저 자기 부인과 딸을 뒷문으로 도망치게 한 후 문 밖으로 나갔다. 포교 일행은 천주학쟁이라는 신고를 받고 왔다면서 다짜고짜 체포했다.

 

한 마을에서 체포된 정문호, 한재권, 손선지에게 포교 김재풍은 천주학을 가르쳐준 선생이 누구이며, 천주교 서적을 내놓고 천주학 일당을 불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손선지가 이 두 사람의 선생은 자기이며 다른 선생은 없다고 말하자, 포교는 손선지를 사학의 괴수라 하여 앞세워 마을을 떠났다. 일행이 동구 밖을 나오는데, 칠십 노모인 임 세실리아와 아내 김 루시아가 울며 따라오자 손선지는 어머니를 돌아보며, "어머니 걱정하지 마옵소서. 소자 잘 다녀오겠으니 염려치 마시고 들어가시옵소서." 하고 하직인사를 나누었다. 일행은 그날 밤을 구진퍼리 주막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향리인 오사현이 손선지를 찾아왔다. 그리고 손선지에게 하는 말이 천주교를 믿지 않겠노라고 말만 하면 포교와 의논해서 빼내 주겠다고 했다. 손선지는 천만부당한 말이라 하면서, 나는 이미 죽기로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고 당신의 그런 유혹이 오히려 나를 괴롭히는 일이라면서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튿날 포교 일행과 죄수들은 전주 부중(府中)을 향해 출발했다. 전주 진영(陣營)에 도착하자 포교의 심문이 시작되었다. 포교는 천주학을 믿는가 다시 확인하고는 천주학쟁이 일당을 불고, 천주교 서적과 성물을 감춘 곳을 대라고 했지만, 종래 말을 듣지 않자 주리를 틀고 주장질을 했다. 형리(刑吏)의 솜씨가 서툴렀던지 손선지의 팔이 부러졌다. 그런데도 포교는 손선지의 옷을 벗기고 포악하게 매질을 하며 다시 다그쳐 물었지만 반응은 매한가지였다. 다음은 영장이 심문을 하는데 천주학을 하는가 재삼 확인하고는 책을 숨긴 곳을 말하라 하며 서양사람이 네 집에 드나든다는 말이 사실인가 물었다. 손선지는 책은 없고 서양인 선생이 다녀간 것은 사실이라 했다. 영장은 주리를 틀고 주장질을 했지만 소용이 없자 하옥했다. 손선지의 몸은 팔이 부러지고 만신창이가 되어 다른 사람이 먹여주지 않고는 물 한 모금을 마실 수가 없었다.

 

손선지가 옥에 갇혀 있는 동안 향리인 오사현이 손선지의 노모를 찾아가서 하는 말이 전주 관아에 있는 친구에게 부탁해 아들을 석방시켜 주겠다며 돈을 요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손선지는 나를 유혹할 사람이라면 아무도 면회 오지 말라고 거절했다. 수일 후 영장은 다시 심문을 하며 조정의 명령이 지엄한데 천주학을 하는 것은 역적 짓이 아니냐고 하자, 손선지는 조정의 명령대로 역적이라면 여러 말 할 것 없이 어서 처형이나 내리라고 했다. 영장은 매질 외에 할 일이 없었다.

 

처형 전날이었다. 옥으로 들려 오는 소문이 내일 사형을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손선지는 함께 갇혀 있던 김사집에게 소창 옷(옛날 중치막 속에 입던 웃옷)을 벗어 주며, 나는 내일 죽을 몸이니 이 옷은 내게 쓸데없다면서 입으라고 주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에게 현세의 옷은 쓸모가 없었던 것이다.

 

1213일 사형은 예정대로 숲정이에서 집행되었다. 사형을 집행하기 전 영장은 판결문에 서명토록 하고는 마지막 사자 음식으로 술 한 잔과 고기 한 점씩을 주었다. 형이 집행될 때까지 손선지는 하늘을 향하여 예수 마리아를 계속 부르며 기도를 올렸다. 드디어 희광이의 칼이 그의 목을 내리쳤지만 칼이 빗나가 어깨를 쳤다. 손선지는 고개를 쳐들고는 희광이에게 단칼에 치지 못한다며 호통을 쳤다. 그러자 희광이는 다시 칼을 높이 치올려 손선지의 목을 내리쳤다. 그는 47세의 나이로 승천했다.

 

3. 성 한재권(韓在權. 요셉)

 

그는 청주 한씨로서 그의 보명(譜名)은 재권(在權)이며, ()는 원익(元益)이다. 그리고 그의 동생은 보명이 재용(在用)이며, 자는 원서(元瑞)이다. 그런데 1901년 로마 교황청에 시복 청원서(諡福請願書)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형의 자()와 동생의 자()가 바뀌어 원서(元瑞)로 제출되었는데, 다행히도 그의 보명은 옳게 기록하여 제출되었다. 그후 원서는 교회의 공식 이름이 되어 한국 순교 성인들의 호칭 기도에도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는 1992년 봄 춘계 정기총회에서 그의 공식 이름을 바로잡는 방법으로 보명을 택하여 한재권으로 고쳐 로마 교황청에 보고하였다.

 

그는 아버지 한언적(韓諺蹟. 도미니코)과 어머니 성주 배씨로부터 충청남도 진잠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이곳에서 전교회장을 지냈으며, 천성이 착하고 근면 성실할 뿐 아니라 신자로서의 본분을 신실하게 지켰으며, 고향에 살 때부터 순교하기를 각오하며 신심 깊게 살았다. 그는 서 막달레나와 결혼했으나 슬하에 아들은 없었고, 딸을 두었는데 훗날 김 루가와 결혼을 했다.

 

그의 아버지는 박해를 피하여 재권(在權), 재용(在用), 재식(在植). 재관(在寬) 4형제를 데리고 완주군 비봉면 다리실로 왔다가, 다시 손선지가 살고 있는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 신리골로 이사하여 정착하였다. 그가 체포되기 며칠 전이었다. 얼마 후에 박해가 닥칠 것이라는 풍문이 들려오자 그는 아내와 동생에게 말하기를, 나는 체포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죽을 사람이니 그리 알라고 하면서 내 뒤를 따르라고 일렀다. 그런 말이 있은 후 125일 손선지 정문호와 함께 체포되어 그날 밤은 구진퍼리 주막에서 자고 다음 날 전주 진영으로 끌려가 진영 앞 구류간에 갇혔다.

 

맏아들인 재권이 잡혀간 후 그의 아버지는 구명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래서 평소 친분이 두터운 박별감(朴別監)에게 부탁하여 영장인 이근섭에게 뇌물을 써서라도 아들이 살아 나올 수 있도록 주선해 달라고 청했다. 한언적은 가문을 이끌어가야 할 맏아들을 잃는 것이 몹시 괴로웠던 것이다. 그래서 한언적은 아들에게 배교를 권하는 편지를 써 보내었다. 한재권은 이런 아버지의 행동이 혹독한 고문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다. 한재권은 아버지에게 배교란 말은 천만부당한 말이며, 아버지가 아무리 그러셔도 소용없다고 냉정하게 말했다. 아버지가 어찌하건 자기는 순교할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하며, 분심하지 않고 치명할 결심을 더욱 다졌다. 한재권에게는 육신의 아버지보다 만인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더 소중했던 것이다.

 

아들을 구명하려는 아버지의 뜻은 끈질겼다. 그래서 형청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며 어떻게 해서라도 석방되도록 힘써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그들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한재권은 아버지에게 배교는 절대 하지 않겠다며, 자기가 떠난다 해도 다른 아들이 있으니, 자기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고 반드시 순교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18661213일 다른 동료들과 함께 바라고 바라던 순교를 하게 되었다. 그는 희광이가 칼을 치기 쉽도록 목을 내밀고는 첫 칼에 목이 잘렸다. 그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증언마다 그의 나이가 각기 다르지만 그의 아내 서 막달레나와 당시 함께 살았던 친지들의 증언에 따라 그의 나이를 38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겠다.)

 

4. 성 이명서(베드로)

 

그는 전주 이씨 임령대군의 후손으로 일명 재덕(在德)이라 불렀다. 그리고 1820년 충청도 공주지방의 구교우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의 가족은 박해를 피하여 전라도에서 유랑생활을 하던 중 고창 신시동과 완주군 구이면 안덕리 고소대 등을 거쳐 마지막으로 완주군 소양면 성지동으로 정착하여 살았다. 그가 이곳으로 들어 온 것은 성지동 신도들이 충청도 출신들이어서 알음알음으로 온 듯 하다.

 

그는 황 아가다와 결혼하여 슬하에 여러 자녀들을 두었다. 그의 성격과 품행은 온순하고 착했으며, 교회 법규와 수계생활을 충실히 지켜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그는 체포되기 전부터 페병(혹 위장병)이 들어 있었다. 어느 날인가 한 마을에 사는 조화서가 마을 교우들에게 하는 말이 아무래도 머지않아서 붙잡힐 지 모르니 도망쳐야 한다고 하며, 만약 피신하지 않고 마을에 남아 있는 다면 그것은 교만한 행동이라고 했다. 그 이유로 예수님의 경우를 들었다. 예수님도 자기를 잡으려는 사람들을 피해 숨으신 것은 교만하지 않으시려는 겸손한 태도 때문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이명서는 사람들에게 사정이 그렇다면 모두 피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는 이미 병든 몸이라 어차피 얼마 안 있으면 주께서 불러 가실 것이고, 그때는 신병도 영원히 나을 것이라 하면서 순교할 뜻을 밝혔다.

 

124일 밤이었다. 전주 진영의 포교 강주봉 일행이 졸지에 성지동 마을로 들이 닥쳤고 이명서는 체포되었다. 그는 막상 일을 당하자 아내와 어린 자식들의 앞날이 걱정되어 심정이 달라졌다. 그래서 포졸들을 붙들고 내가 끌려가면 아내와 자식들이 살길이 없고, 자기는 병든 몸이라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그의 아내와 자식들도 매달렸다. 인정에 못 이긴 포졸들은 이명서를 놓아주면서 오늘밤에 피신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포졸들이 또 올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명서는 그냥 집에 머물러 있다가 125일 새벽에 체포되어 조화서, 조윤호, 정원지와 함께 끌려가다 구진퍼리 주막에 머물었다. 그리고 다음날 진영으로 압송되어 오는데 이명서는 몸이 불편하여 이불을 쓴 채 수레를 타고 진영까지 왔다. 신도들은 두 곳으로 나뉘어 갇혔는데. 성지동에서 잡혀 온 신도들은 진영 앞뜰에 있는 구류간에, 대성동 신리골에서 잡혀온 신도들은 뒷마당에 있는 구류간에 갇혔다.

 

이명서는 다음 날부터 심문을 받았다. 영장은 천주교를 믿는지 확인하고는 나라에서 금하는 일을 하므로 역적이 아니냐면서 지금이라도 당장 배교하면 풀어 주겠지만 순종하지 아니하면 국법에 따라 너는 죽게 될 터인즉 빨리 배교하라고 했다. 그는 대답은 커녕 수십번을 죽는다 해도 천주교를 따르겠노라고 했다. 영장은 그에게 천주교 서적을 감춘 곳을 대고, 누구에게서 천주교를 배웠으며, 일당을 불라고 했다. 이명서는 책은 갖고 있지도 않고, 일당은 있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희생 당할 것이 분명한데, 있다 하더라도 말할 수 없으며, 부모와 형에게서 배웠으므로 스승도 없다 했다.

 

그는 팔과 머리털을 뒤에서 엇갈리게 묶여 육모매질을 당하여 사지가 뒤틀려서 관절이 빠졌다. 그러나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놀랍도록 용감하게 잘 이겨냈다. 이명서는 1213일 동료들과 함께 형장으로 가면서 오늘 우리가 모두 치명을 하면 곧바로 천국에 들어가 진복자가 될 것이니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하며 희열에 넘쳐 말했다.

 

사형장에 도착하자 영장은 사형수들에게 다시 질문했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우리 조선 공맹(孔孟)의 도()는 아니하고, 서양의 도를 하느냐. 이제라도 곧 아니하겠노라 말하면 즉시 방송(放送)하여 너희 처자와 함께 살게 할 터이니 어찌 하겠느냐?" 신도들이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자 그 이유가 무엇인가 물었다. 대답은 이러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찌 좋을 때만 부모를 부모라 하고, 어려운 때는 부모를 부모라 아니하리오? 이치가 그러한즉 천주를 배반할 수 없다"고 이구 동성으로 말했다.

 

영장은 이들이 죽기를 작정한 것을 확인하고, 판결문에 서명토록 했다. 그리고 사자 밥으로 술 한 잔과, 고기한 점씩을 주었다.

 

이렇게 해서 이명서는 46세의 나이로 망나니의 첫 칼에 목이 잘렸다. 그의 목에서도 역시 흰 피가 흘렀다.

 

그가 치명한 후 오사현의 주선으로 그의 시체는 가매장될 수 있었다. 1867218(323)이었다. 오사현은 이명서의 동생 바오로, 사위 안영지(필립보, 딸 마리아의 남편), 이명서의 조카 그리고 조화서의 형제와 조카 또 정원지의 가족들과 함께 가매장한 범바위(부엉바위) 밑 도랑가에로 갔다. 그리고 이명서, 조화서, 정원지의 시체를 유상리 후록 막고개에 안장했다.

 

이들 세 순교자 중에서 유일하게 이명서의 묘만은 자손들에 의해서 관리되어 왔다. 이명서의 아들 가롤로와 며느리 박 마리아는 성지동에서 진안 어은동 모시골로 이사하여 살다가 마리아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가롤로도 1905년에 사망한 뒤로는 이명서의 손자인 이준명(李俊明. 아나토리오 혹 아나돌)이 묘지를 관리했다. 이준명은 이명서의 묘를 진안 어은동 모시골로 이장할 계획을 세웠다. 어은동에서 유상리까지의 거리도 그러려니와 남의 땅에 초라하게 묻혀 계신 것이 마음에 걸려서 모시골로 옮겨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근근자자하게 살면서도 허리띠를 졸라매어 약 4정보 가량의 산을 매입하였다. 그리고 1920322일 이명서의 시체를 유상리 막고개에서 진안 어은동 모시골로 이장하고, 부모를 조부의 발치에 모셨다.

 

그러나 이준명은 후손된 도리를 다했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조부가 치명하신 터를 매입하여 그곳에 비()를 세우는 게 꿈이었다. 이러한 소원은 그가 1929년 전주로 이사하여 이루어졌다. 그는 치명터에 두어 마지기 땅을 기어코 매입하고 말았다. 하지만 비를 만들어 세우기에는 경제적인 능력이 미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같은 문중(門中)이며 어은동 모시골에서 살았던 이춘화가 이 소식을 듣고 1935200원을 들여 화강암으로 십자가 비를 세웠다. 이리하여 치명터를 교회의 소유로 마련하는 첫 계기가 되었다.

 

이명서의 유해는 1968년 여름, 서울 절두산으로 옮겨 순교자 기념관에 모시게 되었다. 그 사연은 이러했다.

 

1968년 병인 순교자 24명이 시복되던 해 2,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서울대교구 윤공희 주교에게 유해 발굴을 의뢰하는 공문이 왔다. 그래서 윤 주교는 전주교구 한공렬 주교에게 협조를 의뢰하여 발굴해서 서울로 모셔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1984년 이명서가 성인품위에

 

오른 후 198412월 전주교구로 모셔 왔다. 그리고 전주교구는 1987년 자치교구 설정 50주년을 맞이하는 해에 102050주년 상임위원회에서 이명서 성인을 천호 성인 묘역에 모시기로 결의하고, 1988101일 이곳에 안장했다.

 

5. 순교자 김영오(아우구스티노)

 

그의 본관은 경주이며 1805년 홍주(현재 홍성) 용면 불무골에서 태어났고, 그의 가문이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부모 때였으며, 부모의 가르침을 따라서 열심히 수계하였다.

 

그는 한국으로 입국하려고 중국에 머물고 있는 선교사를 모셔 오기 위해 중국을 두 번이나 왕래하였으나 허행하고는, 고산 빼재(秀峙)로 이사하여 살던 중 1839년 기해박해를 만나 여러 신도들과 전주 진영으로 끌려갔다. 그는 심문 과정에서 과거 중국을 넘나들던 활약상이 드러나서 천주교의 괴수로 지목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그는 13개월의 옥고를 치른 후 여러 신도들과 함께 마지막 심문을 받던 중, 그런 경황에도 졸음이 왔던지 꾸벅꾸벅 졸고 말았다. 신도들을 심문하던 감사는 졸고 있는 김영오를 보고는 신앙이 덜 박힌 사람으로 판단하고 무죄한 듯하니 석방시키라 하여 풀려났다. 그는 석방된 후 이내 진산 가세발(. 진산면 지방리)로 이사하여 살다가 다시 연산 상사바위로 옮겨 살던 중 병인박해를 만났다. 그는 1866818일 연산 포교에게 잡혀 연산(連山) 관아로 끌려갔다. 여기서 심문을 받던 중 중국을 두 번이나 왕래한 일이며, 회장으로 활약한 경력과 18663월에 순교한 베르뇌 장 주교와 다블뤼 안 주교의 치명한 사정을 털어놓게 되었다. 그는 4일 후 노성(魯城)으로 이수되었다가 3일만에 공주 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로 손목이 모두 부러졌다. 그리고 1866828일 치도곤을 맞고 치명하니 나이는 62세였다.

 

그가 치명하자 아버지의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따라갔던 큰아들 영근(永根. 요한) 부부가 야음을 틈타 아버지의 시체를 훔쳐냈다. 그리고 준비한 면포로 시신을 염습하여 등에 업고 야음에는 걷고 낮에는 가시풀 섶에 시체를 숨겨 놓았다. 그리고 아내가 빌어다 주는 밥을 먹어가며 악취가 등천하는 시신을 업고 5일만에 석장리 (石場里. 완주군 운주면 용복리) 요한의 집에 우선 모셨다가 수청리 산기슭에 안장하였다. 그 후 1988930일 천호 성지로 천묘하였다. (198865일 별세한 김재덕 주교는 김영오의 증손자이다.)

 

[] 박해 시대의 신앙

 

한국 천주교회사는 고난과 선혈의 활자로 엮어진 순교사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행하신 사랑과 희생의 제사인 십자가상 제사의 재현이었다. 죽기까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 민족의 구원을 위해 생명을 바치는 봉사였다. 한국교회가 겪은 박해는 선교의 자유가 묵인된 1886년 이후에도 근대 민족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까지 예외가 아니었다.

 

교회사는 교회가 살고 있는 시대와 민족에 역사하신 하느님의 구제사를 말하므로 교회사를 통해 인간과 시대와 하느님 3자가 어떻게 만났는가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여야 한다. 더구나 유교(儒敎)를 통치 이념으로 하는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조선 왕조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조선 왕조 사회가 천주교를 통해서 들은 일차적 구원은 내세의 구령에 앞서 인간성 회복과 민족 구원을 실현하는 일이었다. 사실, 민족 현실의 개혁을 위한 각성으로서 민본 사상, 인간 평등 사상, 남녀 평등 사상, 인간의 존엄성 사상은 바로 천주교의 사상이었다.

 

이 민족이 천주교를 만나 각성한 사람 대접은 천당 영복을 호소력 있게 선험(先驗)시켰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이 실현될 수 없는 사회에서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고, 더 높은 가치와 인생을 제시하며, 이상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여기에 천주교가 민중 신앙(民衆信仰)으로 성장할 소지가 있었다. 사실, 정교일치의 사회에 새로운 가치관과 세계관과 인생관을 제시할 힘은 종교밖에 없다. 천주의 절대적인 권위 앞에 지상의 모든 권위와 제도는 상대적이 된다.

 

그러기에 조선 왕조는 천주교를 국가 존립의 기초를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사회 체제범(社會體制犯)으로 판단하였고 정교일치의 의식 구조가 생존하는 동안 박해가 종식될 수 없었다.

 

하느님 중심의 절대적인 경천신앙(敬天信仰)은 믿음의 뿌리요 박해를 이겨내는 신앙의 알맹이였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포로요 신들린 사람들이었다. 천주의 뜻을 따르는 데 겪는 죽음과 형벌은 하느님 사랑의 확인으로, 칼날 앞에 원망도 복수심도 없는 평온한 웃음의 여유를 주었다. 순교는 은혜 중 대은(大恩)이고, 은총 중 특총(特寵)으로 영광스러웠다. 순교는 죽음과 폭력 앞에 굴복이 아니라 극복이고 승리였다. 이 영웅적 신앙이 꺼지지 않은 것은 하느님과의 동거 의식을 눈감지 않은 기도였다.

 

기도 : 기도는 하느님과 동거하기를 소원하는 사람들의 긴장된 몸짓이다. 기도가 없었다 면 체포와 형벌의 고통과 죽음을 견딜 수 없었다. 하느님과 동거하는 자는 두려 움이 없으며 자기를 극복하고 초월할 수 있다. 순교자는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

 

성서 : 성서는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으로 성서를 읽으며 자기와 함께 계신 하느님을 분명하게 의식하였다. 자신의 극한 상황에서 복음을 실감 있게 체험하였으며 신 앙 양식의 창고 구실과 유혹의 방패역으로 성서는 믿음의 기반을 다지는 천당 밟 기였다.

 

교리 : 인간은 자기가 아는 바를 믿고 믿는 대로 살아간다. 신앙의 지식은 인식과 이해 정도가 아니라 소화하고 자기 체질화하여 생활화하기 위한 것이다. 옥중에서까지 교리서를 베끼는 열성과 깊은 묵상은 신앙을 심화시키며 옥중 전교의 실례까지 남겼다. 듣는 이의 마음속을 파고들게 신령스럽고, 호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듯 술술 풀리는 교리 해설이 가능하도록 간단없는 노력으로 교리의 요지에 대한 정 밀한 이해는 회화적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죽음 : 현세는 초로(草露), 역려(逆旅), 조약돌에서 튀어나오는 불똥 같은 세월로 인식하 였다. 죽음은 삶의 끝장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출발이었다. 그래서 이 지상에 최종 목적과 가치를 두지 않고 더 높은 곳을, 더 큰 가치를 향해서 일체 를 가볍게 여길 수 있었다. 죽음에 초연한 완전한 자유인으로 미래와 희망 속에 살기 때문에 고통도 가볍게 극복할 수 있었다. 사후 묵상서는 일상적인 영적 독 서였다.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능력은 불가능이 없다고 믿는 철저한 신앙에 살았다. 그 래서 죽음과 인간의 본능을 초탈하고 극복할 수 있었으며, 일체의 공포와 고통에 서 자유스러웠다. 초대 교회 때부터 순교자들에 대한 신심이 교회 생활에 정착되 어 있었다. 그것은 순교자들의 삶이 곧 자신의 삶이 되려는 다짐이었다.

 

순교자는 하느님과 함께 거주하고 하느님의 능력이 영광으로 드러난 자이기 때 문에 순교자의 유해를 특별히 공경하고 영험(靈驗)한 영물(靈物)과 영약(靈藥)으 로 여겼다. 성패(聖牌)와 성물은 생활의 호신물로 부적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것은 하느님의 보우(保佑)하시는 은총 속에서는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 는 소박한 염원이다. 준성사(準聖事)가 생활을 떠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 다. 이러한 현상은 무속 분화(巫俗文化)에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쉽게 수용될 수 있었다. 무속 신앙에 동화된 것이 아니라, 무속 신앙을 천주교가 흡수하여 구출하 고 믿음의 재료로 사용한 한국화 현상이었다.

 

공동체 의식과 형제애 : 이것은 고난을 극복한 구체적이고 인간적인 가장 큰 힘이었다. 서로 재산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며 위로와 격려와 희망을 나누었다. 이러한 삶이 없었다면 치명의 양상은 달라졌을 것이다. 공동체 의식과 형제애는 옥중과 형장 에서 더욱 깊고 숭고하게 오고 갔다. 그것은 사도행전 2, 44-46에서 보여 준 초 대 교회의 모습을 첨삭 없이 재현한 것이다.

 

성사 생활 : 사람은 죄와 죽음과 고난에 홀로 서 있다. 그래서 하느님의 은총을 떠나서 는 살 수 없다. 성사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와 결속을 실감했고 고통과 불안 의 삶 속에서도 인생의 의미를 만나고 성화하며 살았다. 특히 미사는 내 주()시 오 내 천주를 실감하며 만나는 구체적인 현장으로, 그리스도의 운명을 자신과 한 운명으로 체험했다. 미사는 고통과 절망에 가장 감격스런 위로였다. 또한 마지막 일지 모르는 미사였기에 최후로 바치는 미사처럼 절실하고 감격에 벅찼다.

 

영원에 고향을 둔 사람들 : 현세는 영원히 안거할 곳이 못된다는 상식을 망각치 않았 다. 부귀 영화에 경솔하거나 고통과 가난에 절망하지 않았다. 진부하리 만큼 내세 지향적인 것은 그곳에 위로와 꿈이 있기 때문이다. 현세가 중요한 것은 내세를 위한 일회적인 준비 기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리 생활이 강조되었다. 그들의 생존의 중대 이유는 신앙의 불씨가 남기 위해서이며, 확신 있는 주체성과 분명한 가치관을 지니고 생활을 통한 피흘림을 포기하거나 냉담치 않았다.

 

[출처: 천주교 전주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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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06-14
    • 1686
  • 유복자묘
  •  © SISAVIEW71세 유처녀 유섬이   입력 2017.6.13.   [시사뷰타임즈] 1801년 복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아내 신 희와 함께 순교했다. 유항검의 4남1녀 중, 유섬이가 1녀다.   자식들 태어난 순서로는 3번 째다 위로 복자 큰오빠 유중철 요한(23)은 아내 이순이 루갈다(19)와 동정부부였으며 순교했다. 복자 작은오빠 유문석 요한은 18세 때 순교했다.   첫재 남동생 유일석은 6살 때 전라도 흑산도로 유배당했고 둘째 남동생이자 막내인 유일문은 3살 때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당했다. 유섬이는 9살 때 경상도 거제도로 유배당했다.   멀리 거제도 앞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산 기슭에 있는 유복자 묘는 봉분도 없는 평평한 상태에서 잔디도 없고 흙으로 돼있으며 묘석은 없고 묘 앞에 작은 바위가 하나 세워져있는데 柳覆子墓라고 적혀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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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06-13
    • 414
  • [감동!] O holy night!(오 성스런 밤이여!) -lyre & Josh Gro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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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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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05-17
    • 1674
  • 다산 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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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05-17
    • 349
  • 순교자 기념성당(나주 성당 내)
  •  2017.5.16 © SISAVIEW 입력 2017.5.17.   [시사뷰타임즈] 광주대교구 내 광주관구에 속해 있는 이 성지는 역사가 83년 된 곳이다. 이 성지에 있는 본당 마당에 서있으면 주변의 산세와 정경 속에 정신이 차분히 정리/정돈되는 느낌이 든다.   고요하고 성스럽고 차분한 이 성지에 대해 21년째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는 박찬섭(안드레아) 씨는 이 성지 부지가 6천 평이라며 “어떻게 당시에 이렇게 좋은 곳에 터를 잡았는지 모르겠다”면서 좋은 느낌이 드는 곳이라는 말에 대답했다.   박 사무장은 이곳의 신자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에 -이런 질문을 하게된 것은, 주위에 사람이 많이 살지도 않고 교통도 한가한 것을 보며 신자 수가 많지 않으면 운영에 힘들지 않겠는가라는 걱정이 들어서였다- “교적에 올라있는 신자 수는 총 4천 명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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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05-17
    • 446
  • 연풍 성지 성당
  • 연풍성지 석 위에 구멍이 나 있는 돌은 박해시 신자들을 죽이는 살해 도구였다. 사람을 구멍에 목 뒤쪽을 붙이고 서게 한 뒤 목에 밧줄을 걸어 구멍 속으로 넣어 반대편으로 빼낸 뒤 그것을 잡아당겨 목졸라 죽인 것이었다. 2017.4.11 © SISAVIEW    입력 2017.4.11.   [시사뷰타임즈] 충북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 187-2   연풍 성지 성당은 대단히 넓은 면적에 자리 잡고 있는 곳이다. 대본당과 소본당으로 나누어 미사를 집전하는데, 순례객이 몇 십명 정도 선일 때는 소본당에서 미사를 집전한다.연풍성지성당 대본당 문에는 독특하게도 성서 내용이 양각돼 있다. 우측은 십자가 상과 과거 자연석 제대 및 성모상  2017.4.11 © SISAVIEW    순례객들을 평화신문과 대전 태평동 성당 및 기타 지역에서 온 순례객들을 맞이하여 연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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